영화계의 중요한 인사가 얼추 마무리됐다. 올초 국가기관인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 위원장 인사와 부산국제영화제(BIFF) 전양준 집행위원장의 사임이 비슷한 시기에 맞물리면서, 오석근 영진위 전임 위원장의 행보에 줄곧 관심이 쏠렸다.
영화계에서는 “오 전 위원장이 집행위원장이 되지 않겠느냐”는 예상이 중론인 채 비프가 인물 찾기에 고심 중이라는 소문만 돌 뿐 특별한 하마평은 없었다. 그러나 시기가 임박하자 허문영 전 시네마테크 원장이 집행위원장으로, 오 전 위원장은 차승재 씨의 사임 이후 공석이 된 아시아콘텐츠&필름 마켓운영위원장으로 갈 것이라는 얘기가 돌기 시작했고, 지난 25일 실제로 그런 내용의 인사결정이 공지됐다.
영화잡지 씨네21의 편집장을 지낸 허문영 신임 비프 집행위원장은 한국에서 손꼽히는 영화평론가다. 치밀하고 문장이 유려한 그의 평론은 영화를 깊이 즐기는 이들에게 흠모의 대상이었다. 2002년부터 5년간 비프의 한국영화 프로그래머로 활동했고, 그 후 부산 시네필의 성지였던 시네마테크 부산의 원장으로 있었다. 2011년 생긴 영화의전당이 시네마테크를 흡수하자 전당의 고위직인 영화처장을 맡았지만 곧 그 자리를 자진해서 내놓고 시네마테크 프로그래밍 업무를 담당하는 프로그램 디렉터로 옮겨 줄곧 그 일을 해 왔다.
허문영 위원장의 선임이 결론적으로 ‘반론의 여지가 없는’ 인사로 평가됨에도 그의 이름이 처음부터 유력하게 거론되지 않은 것은 우선 명성에 비해 자리에 크게 연연하지 않고 지내온 그의 ‘프리한’ 성향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가 의외로 선뜻 집행위원장직을 수락했다면(실제로 어땠는지는 모르나) 그것은 영화제 초기 멤버로서 피할 수 없는 책임감을 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선임을 쉽게 예측하지 못했던 또 다른 이유는 물론 오석근 전 영진위원장의 존재감 때문이다. 김동호·이용관·전양준 씨에 이어 비프의 마지막 창립멤버인 오석근 씨가 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는 것이 마치 정해진 수순으로 느껴졌다고 할까. 지난 2017년 칸에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김지석 전 수석프로그래머를 포함한 이들 5인은 부산국제영화제를 창업(創業)해 한국 영화계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부산에서 영화제를 만들기 위해 이들이 쏟은 노력은 전설의 ‘무용담’처럼 지역 문화계에 전해질 정도다. 맨발 맨손으로 뛰어다닌 이들의 의지와 활약을 빼놓고는 비프의 태동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명예로운 조직의 수장을 결정하는데 충분한 하마평이 없었던 것, 여전히 많은 사람이 25년 전 창립멤버를 1순위 후보로 떠올렸다는 것, “내가 한 번 해보겠다”고 의욕을 부리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것은 비프의 큰 고민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잡음 없이 매끄럽고 잘 합의된 인사가 품위 있어 보이긴 하지만 일견 활기 없는 조직으로 느끼게도 한다. 1996년 창설된 비프의 지도부가 25년 전과 같다는 것은 창립멤버의 카리스마와 지도력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연스러운 세대교체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세대교체란 후세대가 전세대보다 유능해서 이뤄지는 게 아니라 그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에 이뤄지는 것이다. 비프의 또 다른 25년을 이끌어 갈 관객은 젊은 미래세대이므로, 그 취향과 성향을 잘 파악하고 발 맞춰나가려면 그들과 비슷한 세대에게 권한과 책임을 넘길 수밖에 없다.
영화제의 번영을 그 누구보다 고심하고 있을 지도부는 충분히 이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번에 유의미한 변화가 일어났다. 허문영 집행위원장 선임은 합리적이고 자연스러운 세대교체의 신호탄이다. 이번 인사를 계기로 100년을 이어갈 부산국제영화제를 위해 젊은 세대에게 권한을 이양하는 작업, 새로운 지도부를 육성하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조직의 지향점과 가치를 윗세대와 공유하는 차세대 지도자는 혜성처럼 등장하기보다 키워지는 측면이 강하다.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