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사태가 터진 직후의 일이다. 정부 부처의 인터넷 게시판에 ‘저는 지방직 9급 3호봉입니다’로 시작하는 글 하나가 올라왔다. “월급이 41만 원인데 이것저것 떼고 남은 게 28만 원이다. 거지처럼 안 보이려고 꼭 양복을 입고 다닌다”는 자조 가득한 내용이었다. 정부는 전무후무한 국난을 맞아 고통 분담과 예산 절감을 위해 공무원 정년을 단축하고 임금을 삭감했다. 정부 수립 이후 처음이었다. 안 그래도 박봉이던 하위직 공무원들은 기본적인 생활이 안된다고 고통을 호소했다. 그러나 공무원 처우는 불과 몇년 내에 그전 수준 이상으로 회복됐다. 역설적으로 IMF가 한국 사회에서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달리 보게 만드는 계기가 된 것이다.
9급 공무원은 원래 응시자격에 학력제한이 없다. 하지만 ‘고졸은 9급, 대졸은 7급 이상’이 과거 수험생들 사이의 암묵적 관행이었다. 지금은 그저 옛말이다. 9급 합격자 대부분이 4년제 대학 졸업생이고 서울이나 부산의 명문대 국립대 출신자도 상당수다. 응시자 폭증으로 경쟁률은 평균 30 대 1, 직군에 따라 수백 대 1에 이른다. 40대만 되면 짐쌀 준비를 한다는 민간에 비해 공무원은 더이상 ‘가늘고 긴’이 아닌 ‘굵고 긴’ 직업이기 때문에 미래가 불투명한 대기업 과장, 심지어 전문직 종사자에게조차 매력적이다.
정부가 LH 사태로 야기된 공공부문 부동산 투기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그동안 4급 이상 고위직에만 해당되던 공직자 재산등록 범위를 9급까지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중하위직 반응은 냉소적이다. “비리 일소를 위해 어쩔 수 없다”는 대세론이 없진 않지만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초년병들에게 공개할 재산이 어디 있나. 특급 정보는 근처에도 못 간다”는 불평도 터져나오고 있다. 행정의 모세혈관으로 가장 기초적인 실무를 담당하는 9급 공무원이 상황에 따라 기득권 적폐로 비칠 수 있다는 게 보통 시민에게도 생경할 것이다.
사실 천신만고 끝에 바늘구멍을 뚫은 이들이 요즘 젊은 공무원들이다. 그러나 정상적인 절차를 밟으면 9급 시험에 합격할 수준도 못 되는 사람들이 정치권이나 캠프에서 어른거리다 자신들의 상관이나 더 높은 직급으로 오는 걸 예사로 보면서 허탈해하기도 한다. 공정과 정의를 누구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세대인만큼 비리로 치부한 공직 선배들에겐 혐오감을 갖겠지만 “윗물 아랫물 모두의 책임”이라며 재산공개를 밀어붙이는 정부 조치 역시 이들에게 설득력을 가질 지는 의문이다.
강필희 논설위원 flut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