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잘 알려진 속담이다. 열 길 물속은 자연이고 그것을 아는 것은 사물의 이치, 곧 물리(物理)를 깨닫는 일이다. 한 길 사람 속을 알아가는 일은 인문적 지혜를 터득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열 길 물속을 잘 알까. 물의 깊이는 어렵지 않게 잴 수 있겠지만, 그 안의 무한한 미시 세계에 대해 잘 모르거나 전혀 모를 수 있다. 물속 미시 생태계에 어떤 세균과 바이러스가 있는지 세세히 알 수 없다. 우리가 자연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관점에서 아는 것이다. 너무 야박한가. 그래도 이것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반면 우리는 한 길 사람 속을 곧잘 안다. 자연과학적 지식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뀌듯이 패러다임이 전환되면 앞선 지식이 무지의 수준으로 전락하지만, 사람에 대한 앎과 깨달음은 일상의 경험과 그 경험에 대한 비판과 성찰로 축적된다. 사람이 사람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변덕스럽기 짝이 없다고 한다. 이 말 자체가 사람에 대해 알고 있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을 음흉하다고 한다. 이 표현도 그 사람 속내를 잘 모른다는 의미를 내포하지만, 적어도 그가 엉뚱한 욕심을 품고 분수에 넘치는 일을 하면서 이를 감추고 있으리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쓰는 것이다. 그래서 그를 대할 때 조심하게 된다. 조심하지 않는다면 지혜롭지 못한 것이다. 일상의 지혜는 깨달음을 실천할 때 유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나라의 큰일을 수행할 때는 잘 모를 것 같은 사람에 대해서도 잘 알도록 성실히 치밀하게 노력해야 한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을 곧잘 한다. 당연한 말이다. 정치는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다양한 변화를 일으키는 생명체이다. 그리고 개인마다 독특한 캐릭터가 있다. 정치와 국가 행정에서 헌법을 비롯한 법과 제도는 쉽게 고칠 수 없기 때문에 상수로 작동하지만, 정치인과 관료의 캐릭터는 변수이다. 그들의 개인적 성격이 변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각자의 캐릭터가 주위 상황과 상호작용하며 그때그때 다양한 정치적 현상을 불러일으킨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최근 이러한 캐릭터 변수 때문에 나라가 시끄럽다. 윤석열이라는 캐릭터는 여러 해 전부터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는데, 인사권자인 대통령은 한 길 사람 속을 잘 알려는 노력을 소홀히 했던 것 같다. 더구나 그를 ‘권력 기관’이라고 하는 검찰 조직의 수장으로 임명할 때 신중하지 못했다. 그가 자신은 사람에 충성하지 않고 조직에 충성한다고 했을 때, 그 캐릭터를 잘 살펴보았어야 했다. 그 조직이 ‘국가 공동체’ 전체를 의미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기에 나라에 아주 위험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문재인 대통령은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그를 서울중앙지검장에 임명했고, 이어서 파격적으로 그를 검찰총장에 임명했다. 어떤 무리수와 어떤 파격인지는 세인에게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세세히 설명하지 않겠지만, 그런 방식은 임명되는 사람의 캐릭터를 불필요하게 강화한다.
검사 윤석열의 캐릭터는 소신, 강골, 카리스마 등의 수식어로 묘사되어왔다. 모두 ‘힘’을 느끼게 하는 수식어다. 검찰이라는 ‘거친 일’을 하려면 이런 동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힘 또는 권력은 항상 ‘조동사’로 활용되어야지 ‘본동사’가 될 수 없다. 이는 서구어에서 힘 또는 권력이란 말이 라틴어의 ‘할 수 있다’라는 조동사에서 유래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것은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이어야 한다. 소신을 위한 소신이나 강골을 위한 강골이 아니라는 말이다. 누구를 위한 소신이고 무엇을 위한 강골인지 그 자신부터 잘 성찰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이런 성찰을 할 만한 캐릭터는 아닌 것으로 보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윤석열이라는 캐릭터도 ‘정치적 허영’에 취약할 수 있다는 뜻이다. 소신과 강골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착각하기 쉬운 캐릭터일수록 나르시시즘의 정도가 높고 허영심의 수위도 올라간다. 그가 총장직에 있을 때부터 일부 언론과 정치인은 그의 캐릭터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풍선처럼 부푼 캐릭터는 이제 민중의 시선을 끌고 있다. 그가 원하던 원치 않든 ‘어쩌다 정치인’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 무대에 어쩌다 정치인이 된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10년 전 지자체 보궐선거 때 ‘양보의 미덕’을 지닌 캐릭터로 부상해서 올해도 같은 보궐선거에 관여하고 있는 정치인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전문성이 떨어지는 정치인들은 국민의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만든다. 그들의 행보에 실수가 있을 때마다 ‘이를 또 어쩌나’ 하고 걱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곧 ‘어쩌나 정치인’이 되기 때문이다.
어쩌다 정치인도 열심히 노력하면 ‘어쩌면 이런 정치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어쩌나 정치인이 될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것은 사실이다. 새로운 캐릭터에게 언론과 민중의 관심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다. 이제 어쩌다 정치인 자신의 능력이 중요해졌다.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는 능력 말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테스 형님의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철학자·문화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