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이데올로기를 초월하는 생명의 절대자가 있다. 그것은 신이 아니다. 바로 나무다. 나무는 자신을 태워 산소를 내뱉음으로써 다른 생명들이 숨 쉴 수 있게 해주는, ‘희생의 절대자’다. 나무는 대상을 차별하지 않는다. 곤충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공평하다. 식물이 출현한 이래 3억 5000만 년 동안 나무는 묵묵히 생명을 잉태하고 지켜왔다.
‘생명의 숲’도 시작은 한 알의 열매에서 돋아난 작은 싹이다. 새싹을 틔운 어린 나무라고 해서 모두 큰 나무로 성장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자연에는 새싹에게 우호적인 환경만 있는 것이 아니다. 뿌리가 뻗어나갈 수 있는 촉촉한 대지와 물, 충분한 햇빛이 필요하다. 산새와 동물도 위험요소다. 그러고 보면 나무의 새싹이나 사람의 새싹인 어린이가 닮았다. 안전한 환경과 보호가 필요하다는 점에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사람 새싹’에겐 학교와 부모, 사회라는 울타리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급증하는 아동학대 사건들을 보면서 과연 사람이 나무보다 안전하다 할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보건복지부 ‘전국아동학대현황보고서’에 따르면 2009년 5685건이던 아동학대 신고 건수가 2019년 3만45건으로 10년 만에 5배 이상 늘었다. 가해자의 97% 이상이 부모, 대리양육자, 친인척 등이다. 수법의 잔혹성도 갈수록 더하다. 사람이 나무보다, 꽃보다 아름답다 할 수 있는가?
1901년 ‘모던 스쿨’을 세워 일체의 권위와 폭력에 반대하며 자율성과 창의성 교육을 주창했던 스페인의 ‘교육순교자’ 프란시스코 페레의 외침이 무상하다. 그는 “꽃으로도 아이들을 때리지 말라”고 했다. 그후로 120년이 지났지만 우리의 아동학대는 거꾸로만 가고 있으니 처참하다. 모든 어린이들이 새학기의 꿈을 안고 일제히 등교를 시작한 지난 2일 아침에도 인천의 한 8살 소녀는 학교에 가지 못했다. 경찰은 싸늘한 사체로 발견된 소녀의 몸에 멍과 상처를 다수 발견하고 20대인 부모를 긴급체포했다.
3월 초순 꽃을 피우는 나무는 개나리 산개나리 산수유 생강나무 풍년화 히어리 등이다. 이들은 꽃 색이 모두 노란색이다. 부모로부터 학대만 당하다가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꺾여버린 인천의 어린 새싹에게 최계락 시인의 동시 ‘꼬까신’을 띄우며 명복을 빈다. 부디 저 세상에서는 맞지 말기를.
‘개나리 노오란 꽃그늘 아래 / 가지런히 놓여 있는 / 꼬까신 하나 // 아가는 사알짝 / 신 벗어 놓고 / 맨발로 한들 한들 나들이 갔나 // 가지런히 기다리는 꼬까신 하나’.
이승렬 논설위원 bungs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