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가 활짝 핀 가을 어느 날. 연세대 명예교수이자 영원한 현역이라 불리는 김형석 교수가 쓴 ‘백세를 살아보니’라는 책을 읽었다. 지인의 소개로 문학평론가이자 고려대 불문과 명예교수로 계셨던 황현산 교수가 쓴 ‘밤이 선생이다’란 산문집도 인상 깊게 읽었다. 곰삭은 묵은지처럼 두 노 교수의 삶이 녹아든 옥고를 읽고 분에 넘치는 생각을 했다.
‘같은 잘못을 해도 다른 사람들은 욕만 먹고 말 것을 주먹으로 맞는 후배 선수’들에게 가재, 개구리, 붕어의 삶을 살아본 체육계 선배로서 동네북 신세가 되지 않고 넉넉한 삶을 살 지혜를 알려주고 싶었다. 김 교수가 ‘백세를 살아보니’를 펴내면서 스스로 살아본 인생을 돌이켜 깨달은 삶의 비밀을 허둥대는 인생 후배들에게 다정하고 나지막한 소리로 들려주고 싶다고 고백한 것처럼 말이다.
필자는 대학 시절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비교적 늦게 공부의 참맛을 느낀 사람이다. 공부할 때 ‘죽도록 공부한 것이 아니라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매진했고, 운동선수 출신 치곤 드물게 꽤 들어가기 힘든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교수를 비롯해 한국융합과학회 회장, 서울대 총동창회 이사, 부산광역시체육회와 부산장애인체육회 이사 등을 맡고 있다. 몇 년 전엔 문체부 산하기관인 체육인재육성재단 이사장(차관급), 한국여가레크리에이션학회 회장, 한국체육학회 부회장, 한국시큐리티융합경영학회 부회장, 중학교 체육교과서(2009년/2013년) 저자, 한국연구재단 전문위원, 부산광역시체육회 스포츠공정위 위원 등을 역임했다. 필자가 활동하던 시절 선수 출신이 운동을 그만둔 후 공부로 전환한 사례가 많지 않아 진짜 축구선수 출신이 맞는지 ‘확인사살’하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필자 경험을 일반화할 순 없지만 이처럼 남다른 다양한 경험과 역할을 하며 깨달은 삶의 비밀은 ‘운동선수끼리만 지내지 말고 교실에서 일반 학생을 사귀어 보라’는 것이다. 필자가 선수 시절 공부하고 또 선수를 그만둔 뒤 공부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던 비결은 오롯이 고3 여름 무렵 만난 일반 친구 덕분이다. 고3 때 일반 친구를 만나지 않았다면, 오늘날 필자는 없을 것이다. 그 만남 전까진 우리(선수)끼리 합숙소에서 밥 먹고 놀고 어울린 기억밖에 없다. 시합 참가란 구실로 추억의 보고인 수학여행도 못 갔고 같은 반 친구 이름도 몰랐다. 학창 시절의 추억이라곤 빠따(구타) 한 대 덜 맞으려고 눈알 굴리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뼈가 녹아내릴 정도로 운동한 기억뿐이다. 시험지에 ‘축구부입니다’라고 큼지막이 쓰고 나온 것도 기억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극복하고 극적 변화를 줄 수 있었던 비결은 일반 친구와 나눈 교류와 소통이었다. 교실에서 삶의 궤적이 다른 친구들과 밥 먹고 대화하고 웃고 떠들며 어울려보길 바란다. 처음엔 어색하고 서먹할 수 있다. 여러분이 일반 학생을 신기하게 생각하듯 일반 학생도 그럴 수 있다. 살아온 길과 인생 목표가 다른 친구와 대화하다 보면 말문이 막히고 답답함도 느낄 수 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할 때도 있을 것이다. 부족함을 느낄 땐 창피해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도 들 것이다.
필자 경험에 비춰볼 때 선수 시절 겪은 선배들의 신체적 정신적 괴롭힘(갈굼)과 등쌀을 견뎌낸 맷집 정도면 감당하지 못할 상황이나 조건은 없다. 교실에서 스포츠가치인 인내력, 희생정신, 협동심, 페어플레이, 스포츠맨십,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 등 운동장에서 체화한 향기를 내뿜어주길 바란다. 겉모습만 보고 지레짐작한 친구들이 색다른 향기에 분명 매력을 느낄 것이다.
교실엔 ‘땀 냄새가 밴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보석 같은 친구가 널려 있다. 이런 허물 없는 친구와 깊은 우정과 신뢰를 쌓고, 스스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거든 그때 공부를 시작해도 늦지 않다. 운동할 때의 열정과 인내, 오기를 갖고 선수 생활 기간의 절반만 공부에 매달린다면 반드시 의미 있는 결과를 얻을 것이라 확신한다. 공부하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친구에게 주특기인 운동을 가르쳐주고, 공부하다 모르는 것이 나오거든 주저 없이 도움을 청하길 바란다. 마음씨 좋은 친구는 ‘우리 친구 아이가’라고 넉살부리며 기꺼이 도울 것이다. 나뭇잎, 사과, 나뭇가지, 줄기, 나무 밑동 등 자기 모든 것을 내준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보고 싶다 친구야!
동서대 체육학과 교수·前 체육인재육성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