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는 갈등을 야기하는 만큼, 하게 될 경우 그럴 만한 사유가 있어야 한다. 경제학에선 이를 ‘합리적 무시(rational ignorance)’라고 한다. 개별적 이익집단에서 많이 발생하는 일이다. 가장 흔한 분야 중 하나가 환경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파리기후변화협약’을 탈퇴한 건 미국 내 자기 정파의 이익을 대변한 행동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닥칠 지구온난화의 재해는 모든 지구인이 감당해야 하는 억울한 고통이다. 그 합리는 ‘트럼프 집단’이란 소수를 위한 것일 뿐, 결코 인류의 보편적 합리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소수의 이기적 합리’ 내지 ‘다수의 불합리’라고 해야 한다.
문제의식을 흐려 위기를 모면하려는 논리적 무시도 많이 일어난다. 논리학에서 말하는 ‘논지무시(論旨無視)’가 그것이다. “토머스 제퍼슨(미국 제3대 대통령)은 노예 제도가 잘못됐으니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자신도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노예 제도는 잘못된 게 아니다.” 노예 제도가 틀렸다는 건 제퍼슨 개인의 삶과 무관한 진리인 만큼, 이 사실을 근거로 노예 제도를 옹호하는 이 주장은 문제의 본질을 비켜가는 논리적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얘기하는 ‘확증 편향’을 지닌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행태다. 논리학의 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래서 “모든 논리적 오류는 논지무시로 환원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무시 사례들은 그래도 경제적이든, 논리적이든 나름의 근거나 형식은 갖추고 있어 바람직한 공동체 생활을 가꾸기 위한 쟁점이 될 수 있다. 그렇지 못할 땐 무용한 시간낭비일 뿐이다. 대놓고 무시하는 ‘개무시’가 그렇다. 이런 일이 지난 23일 국회에서 일어났다. 법제사법위원회 국민의힘 간사인 김도읍 의원이 추미애 법무부 장관에게 질문하기 위해 “장관님” 하고 세 번이나 불렀지만, 추 장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추 장관 아들의 병가 연장 의혹을 둘러싼 신경전 탓으로 짐작된다. 지난 21일에도 추 장관은 “어이가 없다. 저 사람은 검사 안 하고 국회의원 하길 정말 잘했다. 죄 없는 사람 여럿 잡을 것 같다”며 김 의원을 비난해 물의를 빚은 바 있다.
상대가 아무리 밉다 해도 국민의 대리 소통장인 국회에 나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납득하기 힘들다. 무시는 곧 불통이자 독단이며, 독재의 지름길이기도 하다. 극우세력의 광화문 집회 고집이 그 단적인 폐해다. 이를 나무라면서 같은 행동을 하니, 어찌 이해해야 할까. 무시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게 다수 국민의 심정이다. 이 또한 무시하려나.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