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내가 가장 좋아했던 스포츠는 뭐니 뭐니 해도 야구였다. 그것도 고등학교 야구였다. 청룡기, 봉황대기, 황금사자기 같은 고교 야구 대회의 일정을 줄줄이 꿰차고, 라디오 스피커에서 울려 나오는 중계를 들으며, 나는 고향 팀을 열렬히 응원하곤 했다. 그때 내게 최고의 우상은 단연 최동원 선수였다. 이런 이유로 동네에서 야구를 할 때마다 마운드에서 곧잘 그의 투구 폼을 흉내 내곤 했다. 로진 백을 잡는 시늉을 하며 있지도 않은 안경을 마치 쓴 것처럼 금테를 한 번 만지작거리고, 특유의 용틀임 자세로 상대 팀 아이들을 삼진으로 돌려세우던 기억은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
최동원. 그는 당시 부산을 넘어 전국구 스타로서 한국 야구의 대명사였다. 그런 그의 전설적 기록들은 얼마나 그가 야구를 사랑했으며 열정을 바쳤는지 그 가늠자 역할을 하지 않을까 싶다.
부산의 야구 명문 경남고 시절, 최동원은 강호 경북고와 선린상고를 상대로 무려 17이닝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와 붙었을 때는 모두 27개 아웃카운트 중 20개의 삼진을 잡아내는 만화 같은 기록을 남겼다. 우여곡절 끝에 입학한 연세대 시절에는 준결승에서 맞붙은 동아대와 승부가 나질 않아 다음날까지 무려 18이닝을 이어 던지며 승리로 이끌었고, 그날 또 성균관대와 맞붙은 결승전에선 완투를 하며 우승을 거머쥔 도무지 믿기지 않는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야구 팬에게 절대 잊을 수 없는 장면은 1984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 그가 마운드에서 이뤄냈던 역투였다.
당시 전기리그 우승을 했던 삼성이 져주기 논란을 무릅쓰고 후기리그 우승을 롯데가 할 수 있도록 시즌 운용을 하면서 성사된 한국시리즈, 모두가 삼성의 우세를 점쳤던 시리즈에서 그는 선발 완투와 구원투를 포함해 4승 1패라는 초인적인 기록을 달성해냈던 것이다. 그가 던지는 경기 거의 모두를 승리로 이끌며 7차전까지 버텨낸, 열세였던 롯데에 결단코 불가능했던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게끔 한 주인공이 바로 그였다. 9회 말 삼성의 장태수를 마지막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마운드에서 껑충껑충 뛰던 그 모습은 지금도 잊히질 않는다. 팀을 위해서라면 스스로 희생을 감수하는 진정한 스포츠 정신, 그리고 불 같은 강속구와 낙차 큰 커브로 타자와의 승부를 절대 피하지 않았던 두둑한 배짱, 게다가 오늘 던지고 내일 또 마운드에 서는 연투 능력은 그가 우리의 영웅이 될 만한 자격을 충분히 갖췄음을 보여주는 요소다.
늘 세간의 화려한 주목을 받고 최고의 연봉을 받았던 그였지만 결코 자신만을 생각지 않았고, 다른 선수들의 권익과 복지를 위해 선수협 결성을 주도한 일로 훗날 그는 야구선수로서는 다시는 부산에 속하지 못하는 비운을 맞고 만다. 롯데 구단은 삼성의 김시진 투수와 맞트레이드하는 초강수를 두었고, 이후 그는 자연스럽게 선수로서의 생명을 잃어갔다. 부산하면 야구, 야구하면 최동원이라는 등식이 깨져버린 이 사건으로 나는 한동안 프로야구에 대한 관심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늘 일상이 힘들고 지칠 때, 혼신을 다해 던지던 그의 공 하나로 생의 위로와 희망을 찾았던 부산 팬의 간절한 마음이 통해서였을까, 2009년 7월 4일 부산 사직구장 마운드에 그가 돌아왔다. 비록 경기 전 시구였지만 그토록 바라던 등번호 11번의 롯데 유니폼을 입고 예전의 강속구는 아니지만 그 특유의 폼으로 팬들에게 던진 그 마음은 감격 그 자체였다.
하지만 2년 뒤 그는 다시는 올 수 없는 머나먼 길을 떠나고 말았다. 향년 53세, 그 짧은 생을 뒤로하고 그는 우리와 함께 만들었던 추억만을 남긴 채 영원히 마운드를 떠나갔다. 야구가 그의 삶이었다. 그 삶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절대 후회하지 않을 땀과 진심으로 매번 공을 잡았을 그의 지문을 상상한다. 어릴 적 나의 우상이 남긴 불꽃 같은 기억이 그 속에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이제 며칠 뒤면 그의 9주기가 돌아온다. 영원한 우리의 무쇠팔, 최동원 투수가 정말 그립다.
시인·부산 경원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