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임기 만료를 1년여 앞둔 2016년 2월, 보수의 거목이라 불리던 연방대법관 한 사람이 갑자기 사망했다. 미 연방대법관은 사망 사퇴 탄핵 등의 사유가 아니면 물러나지 않는 종신직이다. 민주당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인준 권한을 가진 상원의 다수파 공화당은 후보에 대한 청문회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14개월을 끌던 대법관 임명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고서야 마무리됐다. 물론 오바마가 아닌 트럼프 지명 인사였다. 재미있는 건 연방대법관들이 자신을 선택한 정권의 입맛에 맞는 판단만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용훈 대법원장을 임명했을 때 코드 인사 논란이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 대리인을 맡았던 이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이 전 대법원장은 재임 6년간 한번도 소수의견을 내지 않았다. 논쟁적 사안에서 항상 다수 의견을 지지한 것이다. 가장 성향이 비슷했던 사람은 이 전 대법원장 시절 대법관을 지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었다. 좌편향 논란의 중심이었던 인물과 진보정권에 의해 사법적폐로 몰린 인물이 같은 이념 지형을 보인 건 아이러니다. 대법관을 단순히 진보나 보수라는 잣대로 나누기가 이래서 어렵다.
오늘 이흥구 대법관이 권순일 대법관 후임으로 취임한다. 이 대법관은 판사로는 드물게 국가보안법 위반 전력이 있고, 진보 법관 모임으로 알려진 우리법연구회에서 활동했다. 이 정부 들어 임명된 대법원장과 대법관 11명 중 이런 진보 계열 단체 출신은 6명이나 된다. 이때문에 대법원의 이념 편향 우려가 높은 게 사실이다. 최근 이재명 경기지사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전교조 법외노조 처분 취소 사건 등에서 하급심이나 기존 판례와 다른 판단이 나와 더욱 그렇다.
대법원은 그 절대적 권위로 우리 사회의 규범이나 기준을 재확인하고 때로는 바꾸기도 한다. 요즘 성범죄 판결에서 자주 언급되는 ‘성인지감수성’이란 개념은 56년 전 되레 피해여성의 상해죄가 인정된 ‘혀 절단 사건’ 땐 존재하지도 않았다. 법원 판결에도 시대적 변화와 요구가 반영된다. 그러니 판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판사 개인의 소신이나 이념보다 변화를 읽는 감수성이나 정의감일 수 있다. 판사라면 누구나 고도의 법률 전문성과 함께 품위와 격조가 요구된다. 하지만 사회적 파장에 대한 책임감 역시 중요하다. 대법관에 대한 국민 기대는 훨씬 더할 것이다.
강필희 논설위원 flut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