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여야 원내대표가 오랜만에 만났다. 지난달 28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156분이나 이어진 오찬 회동 분위기는 비교적 화기애애했다고 한다. 뼈 있는 농담이 오갔다고는 하나, 새 국회가 출범하는 마당에 서로 잘해보자는 자리이니 그럴 만도 했다. 긴 시간 회동을 관통한 주제는 역시 여야 간 협치였다. 그래서인지 언론은 이날 메뉴로 나온 채소비빔밥에도 의미를 부여했다. 돌이켜보면 문 대통령 취임 이후 청와대와 여야 간 만남에 비빔밥은 단골 메뉴였다. 화합을 상징하는 음식으로 이만한 게 없고, 청와대 역시 이를 통해 강력한 협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을 터이다.
물론 비빔밥 한 그릇씩 먹었다고 제대로 협치가 이뤄지리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저 이미지로 포장하고 메시지만 전할 뿐이라면 또 하나의 이벤트에 그칠 뿐이다. 지난 2018년 8월 문 대통령과 여야 5당 원내대표 오찬 회동 때도 5당의 화합을 의미하는 오색비빔밥 메뉴가 화제에 올랐다. 이날 회동의 성과 가 없진 않았다. 여야정 국정 상설협의체를 분기별로 개최키로 하는 등 몇 개항의 합의를 이끌어 내서다. 그 결실은 그 해 11월 첫 상설협의체 회의로 이어졌고 이 자리에서는 12개 항목에 대한 실질적인 합의가 이뤄지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이후로 상설협의체 활동은 전무했다. 지난달 28일 오찬은 2018년 11월 첫 회의 이후 1년6개월 만의 청와대와 여야 원내대표 만남이었다. 그러니 당시 상설협의체란 게 아직 유효한 건지도 의문이다. 그 이유가 그간 여야 간 극한 대립에 있었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이번 회동 또한 색깔만 다를 뿐 비빔밥 한 번 먹고 잊혀지는 과거 모습을 되풀이하지 않을까 하는 시선이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당장 오찬 회동 하루만에 여야는 21대 국회 상임위원장 배분 등을 놓고 부딪쳤다. 원 구성을 앞두고 일정 부분 기싸움이 없을 순 없으나 협치의 길이 순탄치 않음을 예고한 셈이다.
성공적인 협치로 이어지진 못했지만 1년6개월 전 상설협의체 첫 회의 합의문 내용은 지금 봐도 별 나무랄 데가 없다. 대략적으로 소상공인 자영업 저소득층 지원을 위해 법안 처리 및 예산 반영 등 모든 방안 강구, 경제 활성화 초당적 협력, 지방분권과 지역 활력 제고 합심, 저출산 문제 법안과 예산 초당적 처리, 공정경제 제도적 틀 마련,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 협력, 대표성과 비례성을 확대하는 선거제도 개혁 협력 등이다. 국정 현안 전반에 대한 초당적 협력 방안을 담았다. 물론 추상적인 담론인 데다 합의란 게 모두 이뤄질 수 있는 것도 아니긴 하다. 하지만 그 이후 정국 흐름을 보면, 사사건건 이 합의와는 거꾸로 가기만 했다. 아무리 구속력 없는 합의문이라지만 이런 휴지조각도 없다.
하긴 문 정부 출범 이후 협치는 늘상 거론돼 왔다. 문 대통령은 당선 직후부터 야당 대표들을 만나 협치를 강조했다. 하지만 취임 이후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공허한 메아리가 돼버렸다. 인사청문회 정국에서 야당의 반발은 거셌고 대통령 또한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임기 전반 내내 이뤄진 것은 익히 아는 대로다. 야당의 발목잡기가 과도한 측면이 없진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문 대통령은 협치를 그토록 강조했던 모습과는 딴 판으로 갔다. 양보 없는 협치란 없는 법이다. 협치를 하자면서 그간 야당에 일방적 협력만 요구한 게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양보 없는 문 대통령에 문제가 있다 해도 ‘묻지마 반대’로 일관한 야당의 원죄가 사라지진 않는다. 어떤 이유에서건 여당에 177석이라는 의석을 몰아준 4·15 총선의 표심이 그 증좌다. 미래통합당 또한 따가운 국민의 질책을 잘 알고 있으니 굳이 더 보탤 것도 없겠다. 다만 어제 공식 출범한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가 어떤 변화의 모습을 보여줄지가 관건이다. 김 비대위원장 역시 이를 의식한듯, 당의 정책기조를 ‘약자와의 동행’으로 정하고 성장 중심의 보수 경제 노선 탈피를 천명했다. 만시지탄이긴 해도 바람직한 방향 설정이다. 이런 전향적 태도라면 그간 삐걱대기만 하던 협치를 못 이뤄낼 이유가 없다.
어쨌든 1년6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허비하고 여야가 다시 협치의 자리를 마련했다. 성공 여부는 여전히 미지수다. 다만 협치의 성공을 위해 꼭 명심했으면 하는 게 있다. 협치가 전환기나 정국이 경색됐을 때 위기 탈피용 등 일시적 이벤트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2018년 구성된 여야정 협의체에 굳이 ‘상설’이란 말을 넣은 이유도 다른 데 있지 않다. 협치가 일상화돼야 한다는 얘기다. 그렇지 않다면 앞으로도 비빔밥의 종류와 색깔만 다를 뿐,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이번 오찬 회동에서 확인했듯이, 1년6개월 전 합의문 문구는 아직도 유효하고 이를 제대로 실천만 하면 될 일이다.
논설실장 jjk@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