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선생님께서 연꽃 사진과 함께 ‘애련설(愛蓮說)’의 문장을 휴대전화 문자로 보내오셨다. ‘애련설’은 알려진 대로 북송의 유학자 주돈이가 지은 것이다. 연꽃을 사모하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문장은 이러하다.
“물과 땅에서 피는 초목의 꽃 가운데에는 사랑할 만한 것이 매우 많지만 진나라의 도연명은 국화를 각별히 사랑했고, 당나라 이래에는 세인(世人)들이 모란을 사랑했다. 나는 연꽃을 유독 사랑하는 바, 연꽃은 진흙에서 자라지만 더럽혀지지 않고, 물에 씻겼으나 요염하지 않고, 가운데는 텅 비어 있고 바깥은 곧으며, 덩굴로 자라지 않고 가지를 치지 않는다. 연꽃의 그 향기는 멀어질수록 더욱 맑고, 우뚝하게 서서 깨끗하니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어도 함부로 하거나 갖고 놀 수 없다. 생각하건대, 국화는 은자(隱者)이고, 모란은 꽃 가운데 부귀하며, 연꽃은 꽃 가운데 군자(君子)라 이를 만하다. 아! 국화를 사랑하는 것을 도연명 이후에는 들은 바 드물고, 나와 함께 연꽃을 사랑할 이는 또 누구일까? 모란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많을 것이다.”
다시 읽어보아도 참 아름답고 격조가 있는 문장이다. 국화와 모란, 그리고 연꽃을 사랑하는 이들에 대해 말하면서 연꽃의 성품에 대해 상세하게 적고 있다. 대개 연꽃의 성품을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고 말하듯이,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리면서도 결코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것이 연꽃이라고 썼다. 요염과 교태를 모르고 줄기의 한가운데가 텅 비어 공적(空寂)하지만 곧게 뻗으며, 덩굴과 가지 없이 자라남도 연꽃의 됨됨이라고 적고 있다. 은은한 향기가 멀리 나아가니 이것은 가히 연꽃의 매력이라면서 이러한 면모로 볼진대 연꽃은 군자에 비견할 만하다고 감탄한다.
이 글은 다만 연꽃에 대한 찬탄의 문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녀야 할 내심(內心)의 내용을 함께 언급하고 있다고 하겠다.
아마도 이 ‘애련설’을 선생님께서 내게 보내온 연유는 사찰과 거리에 연꽃 모양 연등이 달려 있는 것을 보신 후에 때마침 연꽃의 성품에 대한 생각에 이르셨기 때문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곳곳에 연등의 물결이다. 전국 사찰에서는 부처님 오신 날을 봉축하고 코로나19 극복과 치유를 위한 기도 정진이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 집단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봉축행사도 한 달 미루었다.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은 봉축일을 앞두고 법어를 통해 “2600여 년 전에 카필라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난 아기 부처님께서 일곱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아래에 붉은 연꽃이 피어났다”면서 “연등에 불을 켜고 어둠을 밝히는 것은 내 마음속 어리석음과 욕심인 무명(無明)을 밝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연등을 다는 일에는 지혜로 세상을 밝힌다는 귀한 뜻이 담겨 있다. ‘현우경(賢愚經)’에는 ‘빈자일등(貧者一燈)’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난다’라는 여인은 몹시 가난했지만 시장과 골목을 돌며 구걸해 겨우 한 푼 돈을 얻는다. 그 돈으로 등과 기름을 사서 붓다에게 등불 공양을 올린다. 그 등은 매서운 비바람에도 마지막까지 꺼지지 않는다. 진정한 공양은 재물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성스러운 마음에 있다는 가르침을 말하는 일화이기도 하다. 연등을 공양하는 까닭은 세상을 밝히듯 자신의 마음 또한 밝힌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저녁 공양을 마친 스님이/ 절 마당을 쓴다/ 마당 구석에 나앉은 큰 산 작은 산이/ 빗자루에 쓸려 나간다/ 산에 걸린 달도/ 빗자루 끝에 쓸려 나간다/ 조그만 마당 하늘에 걸린 마당/ 정갈히 쓸어놓은 푸르른 하늘에/ 푸른 별이 돋기 시작한다/ 쓸면 쓸수록 별이 더 많이 돋고/ 쓸면 쓸수록 물소리가 더 많아진다”
작고한 이성선 시인의 시 ‘백담사’이다. 저녁 식사를 마친 스님 한 분이 비질을 하고 있다. 절 마당 한쪽 구석에는 산 그림자가 내려왔을 것이다. 비질을 하니 큰 산과 작은 산이 쓸려나가는 듯하다. 깨끗하게 쓸어놓은 절 마당에는 하늘도 내려온 것 같은 느낌이다. 혹은 하늘이 푸르고 깨끗하니 마치 잘 비질한 절 마당 같았을 것이다. 스님의 비질이 계속될수록 세상이 온통 맑아져 그곳에 별과 물소리가 돋고 쌓인다. 이 시는 비질이라는 행위를 통해 한 존재의 내면과 우주를 함께 씻고 말끔하게 하는 일에 대해 말한다. 이때 비질은 연등을 켜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흔히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사바세계라고 한다. 사바세계는 참고 견디면서 살아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연등을 밝히는 이유도 고통의 바다인 이 세상에서의 삶에 안락이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나 자신의 내면에 빛을 들여 밝게 밝힘은 물론 내가 밝힌 작은 빛의 연등이 나 이외의 사람들에게도 닿아서 그들 모두가 행복하기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그러므로 연등의 빛은 자애와 자비의 빛이다.
달라이라마는 “종교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 “종교의 핵심은 친절입니다. 지금 당신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베푸십시오. 그것이 종교입니다. 깨달음에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오. 깨달음이 너무 강조되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필요한 것은 자비입니다. 자비를 실천하며 살아간다면 깨달음은 약속되어 있습니다.”
명료하고 간단한 답변처럼 보이지만, 이 답변처럼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 친절을 베풀고 자비를 실천하는 일에는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나누는 것도 포함된다. 다른 사람이 괴로움에서 벗어나 안온을 얻기 바라는 것도 친절이요, 자비심이다. 불교에서 유마거사는 “뭇 생명이 아프므로 나도 아프다”고 했다. 모든 존재가 병에서 벗어날 때에 자신의 병도 사라진다고 했다. 다른 생명의 고통을 자신의 그것으로 여겼다. 동체대비의 자비심을 실천했다.
유마거사는 “모든 중생의 몸의 병, 마음의 병 다 고치고 편안하게 하는 의왕(醫王)이 되겠습니다”고 서원했다. 연민하는 마음 또한 큰 자비의 마음이다. 코로나19로 힘든 시기를 보내는 이즈음에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도 연등이 하나 밝게 켜졌으면 한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