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더욱 뚜렷해지는 모양이다. ‘기본소득’ 담론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 재산이나 노동의 유무에 관계없이 모든 국민에게 일정액을 지급하는 기본소득은 불과 3주 전까지만 해도 비주류의 이상론으로 여겨졌다. 그랬던 기본소득이 코로나 사태에 따른 글로벌 경제위기가 깊어지면서 생존이 걸린 현실론으로 바뀌었다. “코로나로 죽는 것보다 굶어죽는 게 더 빠르겠다”는 절규가 도처에 절절하다. 기본의 부재가 뼈저리다.
월 60만 원의 기본소득 공약을 내건 기본소득당이 “코로나 사태가 해결될 때까지 대구·청도지역에 기본소득을 일시적으로 도입하자”고 제안한 건 지난달 25일이었다. 이어 이재웅 전 쏘카 대표가 “경계에 서 있는 소상공인, 프리랜서, 비정규직, 학생, 실업자 등 1000만 명에게 재난기본소득 50만 원을 지급하자”는 국민청원을 올렸다. 여기에 김경수 경남지사와 이재명 경기지사가 “모든 국민에게 재난기본소득 100만 원을 지급하자”며 힘을 보태고 나서면서 기본소득 담론은 비주류에서 주류로 성큼 발돋움했다. ‘재난’이란 한시적 수식어가 붙긴 했지만, 본질은 어디까지나 인간적 생존권 확보에 있다.
사실 기본소득은 지구촌 공론장에 중요 논제로 호출된 지 이미 오래다. 마카오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은 뒤 매년 모든 영주권자에게 현금 5000파타카(76만 원), 비영주권자에겐 3000파타카를 지급해온 게 단적인 예다. 기본소득은 국내에서도 진보 진영을 중심으로 꾸준히 공감대를 넓혀가고 있다. 저소비→저투자→저생산→저성장→저소득→저소비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탈바꿈하는 요체가 기본소득이라는 공감대다. 반면, 보수 진영은 기본소득을 “국가 재정만 악화시키는 무차별적인 현금 살포”라고 깎아내린다.
하지만 경제이론을 보면 진보와 보수의 구분은 흐릿해진다. ‘헬리콥터 머니(helicopter money)’가 대표적인 경우다. 이 이론은 중앙은행이 경기 부양을 위해 돈을 찍어내 헬리콥터에서 뿌리듯이 시중에 공급하는 방안이다. ‘무차별적 현금 살포’라는 양태도, 전 국민에게 일정액을 계좌로 입금해 주거나 유효기간이 명시된 상품권을 지급해 단기간에 소비토록 한다는 구체적 운용 방식도 기본소득의 특징 그대로다. ‘마카오 연금’과 같은 기본소득이다.
이런 좌파 이론을 우파 자유시장경제론의 대부인 밀턴 프리드먼이 창안했다. 보수주의자가 진보 이론을 주창했으니, 한국의 진보·보수에겐 납득하기 힘든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프리드먼에게 진보·보수의 이념은 무의미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얼마나 효과적으로 유효수요를 창출할 수 있느냐 하는 실용이다. 그런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그는 면세점 이상의 고소득층으로부터 소득세를 거둬 면세점 이하의 저소득층에게 보조금으로 지급하는 ‘부(負)의 소득세(negative income tax)’를 창안하기도 했다. 소득 재분배 효과를 높여 총수요를 늘릴 수 있는 혁신적 이론이다. 모든 복지 제도를 부의 소득세로 단일화하면서 관련 조직과 인력 운용에 드는 행정비용도 줄였다.
오늘날에도 미국 경제학계에 실용주의 정신은 여전히 건재하다.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가 “단기 부양책의 목표가 사람들에게 현금을 쥐어주는 것이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며 재난기본소득 지급을 주장한 데서 그 정신을 목격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올 연말까지 급여세를 면제하겠다고 하자, “근로소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소용이 없다”고 비판하면서 밝힌 견해다. 프리드먼과 크루그먼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이유를 짐작게 한다. 제이슨 퍼먼 하버드대 공공정책대학원 교수는 “시민권자나 납세자인 모든 성인에게 1인당 1000달러(110만 원), 아동 1인당 500달러를 주는 일회성 지급안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의회에 요청했다. 재난기본소득이 그가 생각하는 최선의 총수요 증가 방법이라고 한다.
우리 정치권도 이제 부질없는 진영 논리와 이념 다툼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본소득을 둘러싼 정치권의 포퓰리즘 논쟁은 코로나에 감염되고서도 먹고살기 위해 못 쉬는 취약계층에 대한 모독으로 다가온다. “코로나 사태의 직격탄을 맞은 우리 경제는 공황 수준에 버금갈 정도로 꽉 막혀 있다. 전시에 준하는 특단의 경제 대책이 필요하다”는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의 말은 옳다. “메르스·사스와 비교가 안 되는 비상경제 시국인 만큼 정부는 전례 없는 대책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판단과 상통한다.
지금이 기회다. 4·15총선을 기본소득 공론장으로 만들자. 기본소득 정책 대결이 고용 없는 4차 산업혁명시대를 헤쳐갈 묘안을 선사할지도 모른다. 토지 등 공동자산 소득을 공평하게 나누는 기본소득이 필수 제도가 될 시대다. 코로나 위기는 그 시대로 가는 작은 시련일 뿐이다.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