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여당 대표가 “선천적 장애인은 의지가 약해…”라는 말을 해 논란이 일었다. ‘의지’란 일 처리의 능동성을 의미한다. 신체적 장애 여부와는 무관하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지는 정치권의 장애인 비하 표현을 개인 인성 탓으로만 돌려선 안 된다. 그런 인성이 생기게 한 사회적 원인을 추적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장애인에 대한 왜곡된 사회화가 강했다. 겉으로는 인권을 주장하면서도 장애 문제를 은밀히 대상화하기도 했다.
정치권은 장애인을 정치적으로 상품화했다. 선거철만 되면 장애인을 영입해 ‘장애인 친화적’ 정당으로 포장했다. 여당 대표의 막말에 야당들도 인권 차원이 아니라 정치공학적으로 비난했다. 미디어 역시 장애인 비하 논란을 선정적으로 보도했다.
과거 우리 사회는 장애인을 ‘돌봐야’하고 ‘보호해야 하는’ 존재로만 여겼다. 의지의 주체이자 법적 권리의 주체로 여기지 않았다. 국가가 남는 돈이 있으면 장애인을 위해 (잔여적) 복지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장애인의 주체적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장애인복지법은 장애인이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비장애인처럼 의지적 주체성을 가진 존재이자 사회권의 법적 주체로 본다. 당연히 국가에 복지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도 법적(제도적 복지)으로 보장되어 있다.
장애인 복지제도가 이미 변화되었음에도 아직 언론·교육·문화와 법률·제도는 장애인을 시혜와 보호의 대상으로만 여긴다. 이것이 개인의 의식에도 영향을 미쳐 장애인 비하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이른바 문화지체다. 법률도 개정할 필요가 있다. ‘신체 장애자는(중략)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는 헌법 34조는 장애인의 주체성을 말살하는 상징폭력을 가하고 있으므로 ‘장애인은 법률에 의해 권리 보장의 대상이 된다’고 개정해야 한다. ‘보호’라는 용어가 시혜적 차원에서 돌본다는 열등적 낙인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익광고에서도 은밀한 상징폭력이 행해져 장애인을 의존적 대상으로만 이미지화하면서 그들의 주체성을 약화시켜 왔다. 드라마에서도 항상 장애인을 ‘배려’해야 한다는 점을 줄기차게 강조한다. 배려가 나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대등한 조건에서의 배려와 달리, 의도가 있든 없든, 우월성이 전제된 배려는 시혜적이자 수직적 개념이 내재되어 종속성을 심화시키는 측면에서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는 시혜가 아니라 수평적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이 내면화되어야 하며 장애의 특성을 ‘고려해야’ 하는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미 장애인차별금지법 등 관련 법들은 오래전부터 ‘배려’ 대신 수평적 개념인 ‘고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은 용어 사용에서의 시사점을 준다.
사회적 폭력으로서의 장애인 비하를 줄이기 위해서는 어릴 적부터 올바른 교육이 필요하다. 미디어도 왜곡된 상징을 통한 부정적 이미지의 고착화를 하지 않도록 감시해야 한다. 자신들의 은밀한 이익을 ‘장애인 인권’으로 위장해 국민을 세뇌시키려는 사회주체들에 대해 비판적 감시도 늘 가동돼야 한다. 인권교육도 역시 성과주의적 접근에서 벗어나 실질화되어야 하며 막말을 하는 공직자는 공직에서 배제하는 장치를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정당들은 국회의원의 일정비율을 장애인에게 할당하여 최소한의 대표성을 가지도록 하고 공무원채용에서도 장애인 할당비율을 높여야 한다. 예외적 조항을 둬서는 안 된다. 동시에 잔여적 복지의 산물이자 열등적 낙인 성격이 강한 ‘장애인’이란 용어는 차별적 개념이 적은 용어로 개칭할 필요가 있다.
장애인에 대한 다양한 돌봄정책(케어리즘)도 중요하고 장려되어야 하지만, 대부분이 그들을 돌봄의 객체로만 접근해 사회에의 의존성을 심화시켜 온 면이 있다. 돌봄정책의 결정과 집행과정에서 장애인이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집행내용의 문제점에 대해 그들이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장애인 주체적 복지시스템이 법적으로 제도화되어야 한다.
동서대 경찰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