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보다도 오래된 길을 따라 갠지스강으로 간다. 예상했던 대로 신들의 도시 바라나시는 분주하다. 수많은 인파에 릭샤꾼의 호객 행위와 사방에서 울려대는 오토바이 경적과 옷깃을 잡아채는 장사꾼들의 요란함에 혼이 뺏길 지경이다.
그 사이를 순한 소들이 어슬렁거리고 군데군데 개 무리가 널브러져 있다. 자칫 한눈이라도 팔면 바닥의 배설물을 밟게 되는데 비싼 신발을 신은 자들은 오물을 피하느라 바쁘고 맨발의 인도인들은 도리어 여유만만이다. 그들의 순례길에 지갑을 움켜쥐고 눈살을 찌푸리며 경계하는 자는 모두 여행객이었다.
드디어 강을 마주하는 돌계단 앞에 다다랐다. 강줄기마다 붉은 노을빛이 찬연히 번져나간다. 인도 사람들은 이 강을 신의 강으로 부른다. 인도 신화에서 원래 천상에 있던 갠지스강이 시바신의 머리카락을 타고 땅으로 흘러내렸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태어나서 이곳에서 세례를 받고, 숨을 거둔 뒤에는 이 강 속에 뼛가루가 뿌려지기를 원한다. 육신이 강물 따라 신의 나라로 흘러간다고 믿는 것이다.
심지어 강변에는 죽음이 가까워져 오는 자가 죽음을 기다리며 묵는 숙소까지 마련되어 있다. 갠지스강에서 죽는 일만큼 성스러운 일은 없을 테니까.
작은 배에 오른다. 뱃사공이 화장터 가까이 데려다준다. 자욱한 연기 속에 살 타는 배릿한 내음이 코를 쏘았다. 이미 대여섯 군데 화장이 진행 중이다. 관도 없이 천에 동여맨 시신들이 장작더미 불 위에서 열반에 들었다. 유족들은 불더미 옆에 서서 묵언 중이고 지나가는 아이들은 불타는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려다본다.
이때 금빛 천에 친친 감긴 새로운 시신이 들어왔다. 먼저 주검을 강물에 적시고 수염과 머리카락을 모두 밀고 흰옷을 입은 상주가 불을 넣는다. 불꽃이 일고 흩날리던 연기가 뱃전을 에워쌌다. 부유할수록 비싼 백단향나무나 망고나무 장작을 사용한다고 했다. 이미 진행되고 있던 다른 쪽 불구덩이 속에는 반쯤 탄 유골이 훤히 드러났다. 서너 시간 태우고 남은 뼈는 물 위로 던짐으로써 화장은 끝이 난다. 장작의 종류와 더미의 높이에 따라 빈부를 가늠할 수 있다지만, 그것도 부질없는 일. 똑같은 죽음 앞에서 생전의 부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도인들에게 죽음은 슬픈 일이 아니다.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시작의 길이라 여긴다. 가난한 자는 후세에 부자로 태어나며 힘든 자는 내세에 평안해진다고 믿으니까 현세의 고통을 끝내는 축복의 날이다. 그러므로 통곡하거나 눈물을 훔치는 이가 없다. 그저 육신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묵묵하게 지켜볼 뿐이다.
물상이란 잠시 그렇게 있어 보이는 것일 뿐 언젠가는 모두 사라지는 것일 터. 삶은 환상과 같고 타오르는 불꽃과 같으며 물에 비친 달그림자와 같다고 한 붓다의 말씀을 새긴다. 죽음 앞에서 사라지는 것이 삶이지만 죽음 앞에서 더 빛나는 것도 삶일 수 있겠다.
화장터 옆에서는 사람들이 몸을 씻는다. 이곳에서 목욕하는 일은 죄를 씻는 성스러운 의식이다. 사리를 입은 채 물속으로 들어가는 여성들과 웃통을 벗은 반라의 남성들이 성수를 끼얹는다. 그 너머로 쪼그린 채 용변을 보는 아이와 나무뿌리 같은 머리카락을 땋고서 경전을 읽는 수행자, 줄기차게 계단을 쓸고 있는 자, 쉴 새 없이 장작을 쌓는 노인, 계단 모퉁이에서 손으로 음식을 먹는 여인, 엽서를 파는 소년, 눈 비비며 일어나는 노숙자, 잔뜩 멋을 부린 여행자들까지 인간의 삶이 함께 모였다. 겉모습이 뭐가 중요한가. 붓다의 이치 앞에서,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힌두 경전 앞에서 그리고 이 엄숙한 강 앞에서 알고 보면 우리는 모두 하나인 것이다.
연기 자욱한 강 너머로 석양이 진다. 이곳에서 무너지는 것이 어디 석양뿐이랴. 갠지스강에서 삶의 끝을 본 사람이라면 자신의 벽을 허물지 않는 자가 몇이나 될까. 그 무엇도 붙들지 말라는 듯 흩어지는 화장터의 연기를 바라보며 ‘형성된 것들은 다 무너지게 마련이다’는 붓다의 유언을 떠올린다.
평론가·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