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날이 좋았다.” 드라마 ‘도깨비’에 나오는 대사다.
‘모든 순간은 눈부셨다, 지금 이곳, 영원했으면 해, 오십 년 전, 매 순간, 오늘은 잔칫날, 내일은 외로운 검객의 다음 날, 작곡을 시작한 후 십 년이 넘은 후의 모차르트 작품이 지금도 연주된다’. 송년회에서 듣고 메모한 시간에 관한 말이다. 김광석이 부른 ‘서른 즈음에’는 청춘을 노래한다. 화양연화의 시간, 청춘의 시간은 한순간도 머물지 않는다,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자꾸만 멀어져 가며 흘러가는 것은 시간이다.
이것은 모든 것을 잡아먹는다. 새들, 짐승들, 나무들, 꽃들, 무쇠를 갉아 먹고, 강철을 깨부순다. 단단한 돌을 가루로 만들고, 왕들을 죽이며 마을을 폐허로 만든다. 태산마저 무너뜨린다. 이것은 무엇일까? 톨킨의 ‘호빗’에 나온 수수께끼이다. 답은 시간이다. 인간은 시간 속에 살고 죽는다. 시간 없이는 삶도 죽음도 없다. 시간은 거대한 낫을 든 노인으로 형상화된다. 생명을 싹트게 하는 것도 시간이고 생명을 자라게 하는 것도 시간이고 생명을 거두어 가는 것도 시간이다. 프란시스코 고야의 ‘자식을 삼키는 크로노스’라는 그로테스크한 그림은 그리스 신화에 바탕을 둔 시간의 은유다.
크로노스(시간)는 거인족 ‘티탄’이다. 아버지 우라노스(하늘의 신)와 어머니 게이아(땅의 신)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들이 태어나면 왕위를 빼앗기리라! 이 예언을 들은 크로노스는 아내 레아가 아이를 낳는 족족 삼켜버린다.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 하데스, 포세이돈은 크로노스의 배 속에 삼켜진다. 아내 레아는 막내아들 제우스를 낳아 크레타섬에 숨기고 남편에게 돌을 삼키게 한다. 청년이 된 제우스는 돌아와 아버지 크로노스와 싸워 이기고, 크로노스가 삼킨 형과 누나를 토하게 하고 신들의 왕이 된다.
시간은 수수께끼의 단골손님이다. 아침에는 네 발, 낮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인 것은? 스핑크스가 낸 수수께끼의 답은 사람이다. 사람 일생을 기어 다니는 시간, 걸어 다니는 시간, 지팡이 짚고 다니는 시간으로 삼등분했다. 이 수수께끼를 맞추고 스핑크스를 죽인 사람은 오이디푸스다. 시간은 진실을 드러낸다. 아들이 태어나면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차지하리라. 테베의 왕 라이오스는 이런 신탁을 받는다. 왕은 양치기에게 아들을 죽이라 명령하지만, 양치기는 아이를 숲에 버린다. 오이디푸스는 이웃 나라 왕자로 자란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인 줄 모르고 노인을 죽이고, 어머니인 줄 모르고 이오카스테와 결혼해 왕이 되고, 딸 안티고네를 낳는다. 테베에 닥친 지독한 가뭄을 계기로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고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게 된 뒤 그는 두 눈을 찌른 장님이 된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자신이 모르는 부조리한 운명에 휘둘리는 인간에게 자신의 정체성과 인간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요구한다.
노동이 시간을 파는 것이라는 점에서 시간은 돈으로 환산된다. 능력이나 직업에 따라 시간의 값은 차등화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시간은 값이라기보다 가치다. 빌릴 수도 빌려줄 수도 저축할 수도 없다. 오로지 그때그때 가장 잘 사용할 뿐이다. 이대로 멈추었으면 싶은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빨리 지나가 버렸으면 싶은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사람이 체감하는 시간의 역설적 상대성이다. 삶이 순식간에 지나간다면, 삶이 재미있다는 것. 삶이 느리게 지나가기를 바란다면, 삶이 좀 재미없고 불편해도 참을 수 있어야 한다.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모모는 생을 쫓아가는 시계바늘이다. 노래와 함께 떠오르는 미하엘 엔데의 동화 ‘모모’에는 시간에 쫓겨 사는 사람들, 시간을 모으고 뺏고 저장하는 시람들이 나온다. 시간을 잘 활용하고 남부러운 삶을 살지만 행복하지 않다. 가슴이 두근대는 꿈이 없기 때문이다. 가슴 두근거리는 꿈이 있는가? 그렇다면 아무도 당신의 시간을 훔쳐 가지 못한다. 온전히 당신의 시간을 살고 있으므로.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시간도둑에게 털리고 있는 것이다. 시시각각. 빈털터리 허깨비가 되는 줄도 모르고.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