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스필버그를 만났을 때 나는 몸시 긴장했다. 세계적 거장인 그와 무슨 얘기를 나눠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그가 반색하며 내게 다가왔다. “Wow, Jackie Chan!” 그는 아들에게 가져다 주어야한다며 사인을 해달라고했다.…나는 그에게 사인을 건네며 물었다. “‘ET’나 ‘쥬라기 공원’의 특수효과를 어떻게 찍었어요? 특히 사람과 공룡이 함께 나오는 장면 말이에요.” 그가 대답했다. “오, 아주 간단해요. button, button(각종 버튼을 쉬지 않고 누르면 되죠).”
이번엔 그가 내게 물었다. “당신은 그 위험한 액션들을 어떻게 찍었나요? 지붕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이라든가 계곡을 뛰어서 건너는 장면이라든가….” 내가 대답했다. “오, 아주 간단해요. Rolling, action, jump, cut, hospital!”(감독이 ‘액션’하고 외치면 나는 뛰어내리고 ‘컷’을 외치고 나면 병원으로 직행하는 거죠.)
최근 운 좋게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단돈 1만1000원에 ‘득템’한 성룡 자서전 ‘성룡-철들기도 전에 늙었노라’(쌤앤파커스 펴냄)의 한 대목이다. 최첨단 스필버그와 몸의 원초성을 최대로 활용하는 성룡이 만나 나눈 이 대화는 참으로 유쾌하다. 여기서 건져내고 싶은 메시지는 ‘세상 고수들의 성취는 이토록 다양하고 그 각각에서 배울 건 참 많다’는 점이다.
이런 다양한 경지에서 삶의 지혜를 다채롭게 배우는 것이 인문학 공부다. 그렇게 배우려면 잊지 말아야 할 덕목이 있다. 다음 문장은 그런 덕목의 핵심을 품었다. “대개 소통(疎通)을 말하면서 ‘통’(通)에 무게중심을 두고 ‘소’(疎)는 간과하는데, 그래서는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소통의 핵심은 ‘소’에 있다. 소는 트다, 열리다는 뜻으로, 이는 나의 마음이나 자세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국제신문 ‘정천구의 도덕경… 민주주의의 길’ 제266회에서)
‘통할 통’만 강조하거나 거기에만 집착해서는 소통은 제대로 이루기 힘들며 ‘트일 소’가 더욱 중요하다는 이 통찰은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무척 소중한 마음가짐이다. 그런데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할 이는 또 있다. 인문학 강좌를 준비하고 인문학 강사를 초청하는 기획자 또는 주최 측이다. 기획자 또는 주최 측이 편벽되게 어떤 집착에 붙들려 있으면 인문학 공부의 문화는 발전하기 힘들다.
국제신문이 최근 보도한 ‘재정 나쁘다면서…고액 강사 초청엔 펑펑’(지난달 26일 자 9면) 기사를 보면서 일종의 위기감을 느꼈다. 재정이 열악한 기초지자체에서 한 번에 500만 원, 더 많게는 1500만 원에 이르는 비싼 강연료를 주고 유명한 강사를 초청하는 데 골몰하는 경향이 있고, 그런 현상은 좀 과도한 게 아니냐고 기사는 지적했다. 먼저 밝혀두고 싶은 게 있다. 이 글에서 다양한 전문가를 강사로 초빙해 주민을 위해 좋은 강연을 선사하고자 하는 노력을 폄하하거나 안 좋게 보려는 의도는 없다. 균형감을 잃고, 편벽되게 ‘서울에서도 유명한 고액 강사’에게만 집착할 때 몇 가지 문제가 심해질 수 있음을 토론하고 대책·보완책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우선, 지자체에서까지 유명 고액 강사에게만 매달리는 경향이 더 심해진다면, 지역의 (덜 알려진) 고수를 찾아내고 이들 고수를 시민의 친구이자 좋은 ‘스승’으로 자리 잡게 하는 노력은 어쩔 수 없이 타격을 입게 된다. 부산은 인문학 운동도 활발하고 대학도 스무 개(2년제 포함)가량 있는데 찾아보면 사람이 없을까? 내 주변만 해도 강연료 10만~30만 원만 제시받고도 성심성의껏 강연을 준비하는 알찬 전문가는 적지 않다.
이들은 대체로 강연 자체가 자신의 평생 공부나 생계와 직접 이어진 학인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어차피 (적은) 강연료는 신경 쓰지 않는다” “오늘도 주최 측이 ‘재능기부’를 요청하더라”며 허허 웃고 마는 분이 많다. 인문학 강좌에서도 ‘지역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이런 숨은 고수를 알아보고 찾아내거나 적어도 합당함에 가깝게 대우하고 존중하는 것은 지역문화를 가꾸는 일이며 이는 인문학 관련 일을 하겠다는 지역 공공기관의 책무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게 있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고액 강사의 강연을 들으면 수강생의 삶이 당장 더 좋게 바뀌거나 뭔가 큰 걸 곧장 배우리라고 예상하기 쉬운데, 인문학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인문학은 꾸준히 닦아 더 지혜롭게 세상을 보고 내가 더 좋게 바뀌는 길고 꾸준한 과정이다. 공자의 제자가 3000명이었다고도 하고, ‘공문 72현’이라는 표현도 있지만 정작 지금 우리가 듣는 좋은 제자의 숫자는 10명도 안 넘지 않는가? 유명 고액 강사에게 너무 의존하는 경향에 갇힌다면, 인문학 공부의 본령도 왜곡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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