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가 본격 총선 체제에 들어가면서 이번에도 어김없이 거론되는 말이 있다. 이른바 ‘험지 출마론’이다. 요즘이야 예전처럼 깃발만 꼽아도 당선될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특정 당에 유리한 텃밭이 어느 정도는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당의 외연 확장을 위해서는 텃밭이 아닌 험지에서 얼마나 많은 성과를 이뤄내느냐가 큰 변수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유례가 드물 정도로 첨예하게 대립해온 여야 모두에 내년 총선의 의미는 더욱 각별하다. 그런데 최근 험지 출마론을 대하는 여야의 자세는 사뭇 대조적이다. 요약하자면 공수가 바뀐 모양새다.
우선 더불어민주당은 수성의 입장이지만 승리를 향한 절박함이 느껴진다. 민주당은 최근 황인성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김용진 전 기재부 제2차관, 김학민 전 순천향대 산학협력부총장을 영입하는 입당식을 열었다. 당은 이들을 보수세가 강한 험지에 투입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들 뿐 아니라 대중적 인지도와 전문성을 갖춘 현직 장차관을 대거 추가로 험지에 차출할 것이라는 말까지 흘러나온다. 성공 여부를 떠나 안정적인 집권 후반기를 보장하고 재집권 여부를 가늠할 중요한 고비인 만큼 기선을 잡겠다는 결기가 묻어난다.
반면 자유한국당은 어떤가. 초·재선 의원들은 전·현직 당 지도부가 서울 등 수도권 험지에 출마하는 솔선수범 정신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초·재선 의원들 외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6선의 김무성 의원도 가세했다. 여기에 중진들이 발끈했다. 당장 홍준표 전 대표는 영화 ‘친구’ 대사에 나오는 ‘니가 가라, 하와이’란 말로 이들의 요구를 일축했다. “자신들이 먼저 불출마 선언을 하거나 험지 출마를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중진 험지 출마론 뒤에 숨는 것은 비겁하다”는 이야기다. 누가 옳고 그름을 떠나, 서로 ‘니가 가라, 험지’를 외쳐대며 싸우는 형국이다.
험지 출마론을 둘러싼 한국당의 이런 모습은 기시감이 짙다. 지난 총선을 앞두고 벌어진 사태를 빼닮아서다. 당시에도 새누리당 비박계를 중심으로 험지 출마론이 봇물 터지듯 나왔다. 다르다면 친박 비박 간 계파 싸움 양상을 띤 점 정도다. 여기에 가만히 있을 친박계가 아니었다. 친박계 의원들은 김무성 대표가 먼저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며 맞불을 놓았다. 이 같은 계파 간 공천 전쟁이 빚어낸 20대 총선의 참담한 결과는 익히 아는 바다. 그러고도 4년 뒤 어김 없이 도돌이표 행보를 보이고 있다.
하긴 험지 출마론을 둘러싼 갈등만 문제일까. 박찬주 전 육군대장 영입을 둘러싼 해프닝은 그나마 한국당에 다시 기대볼까 하던 중도층의 고개마저 갸웃거리게 했다. 한바탕 홍역을 치른 당 지도부는 2차 인재 영입부터는 국민 공감을 얻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뒷북도 이런 뒷북이 없다. 박 전 대장 영입은 국민 공감 이전에 상식 수준에서 충분히 판단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2차 영입부터는 기준과 절차를 보완하겠다지만 얼마나 국민이 공감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역대 총선에서 인재 영입은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무엇보다 한국당은 야당이다. 여당으로 치른 20대와는 사뭇 다른 자세로 이번 총선에 임해야 하는 이유다. 국민이 놀랄 만한 물갈이 없이 과거처럼 어정쩡한 자세를 보였다간 승리는커녕 참패나 면하면 다행이다. 당장 지난 총선 때 야당이었던 민주당이 보인 공세적 전략을 보면 답이 나와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멘토였던 김종인 전 의원을 비대위원장으로 선임할 정도로 파격 행보를 보인 것이다. 이후 분야별 전문성을 갖춘 인재를 영입했고 이들 다수는 당선됐다. 이런 결기가 있어도 모자랄 판인데 한국당은 되레 거꾸로 가고 있다.
그나마 김세연 의원이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당 지도부에 던진 고언이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당내 개혁파로서 무게감 있는 3선 의원의 선택이라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정작 불출마 선언을 하고도 남을 의원들은 꿈쩍도 않고, 당을 바꿔나갈 만한 인물은 불출마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한국당의 현주소다. 오죽했으면 “한국당은 수명을 다했고, 존재 자체가 역사의 민폐이며, 생명력을 잃은 좀비 같은 존재”라고까지 했을까. 자당 의원의 비판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섬뜩한 지적이다.
따지고 보면 자당 의원 입에서 나온 말이어서 충격적이지, 그간 한국당을 향했던 비난을 감안하면 새삼스러운 내용도 아니긴 하다. 당 지도부와 많은 소속 의원이 애써 여기에 귀를 닫고 있었을 뿐이다. 그저 추락하는 대통령과 여당 지지율에 편승해 희희낙락하며 자기 자리를 보전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뼈를 깎는 쇄신은커녕 ‘니가 가라, 험지’나 외치며 모래알처럼 제 살길만 찾는 당에 표를 줄 유권자는 많지 않아 보인다. 더는 ‘역사의 민폐’로 남지 않기 위해 지도부가 선택해야 할 길은 자명하다.
논설실장 jjk@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