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구씨를 그득하게 가지고 있었다. 여름마다 친정에서 보내준 살구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다른 과실들과는 달리 살구는 두 쪽으로 쪼개지면 씨가 똑 떨어져 나온다. 공깃돌처럼 가지고 놀기에 맞춤한 크기의 살구씨는 아까워서 버릴 수가 없다. 그걸 보면 어릴 때 돌멩이들을 흙바닥에 잔뜩 펼쳐놓고 놀던 게 떠오른다. 내가 자랐던 곳에서는 그 놀이를 ‘찰깨’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찰깨’가 어디서 온 말인지 모르겠다. ‘살구받기’라고도 했는데, 혹시 살구씨를 가지고 논 것에서 유래된 이름일까? 요즘은 다 공기놀이라고 한다. 도대체 공기놀이의 공기는 무슨 뜻일까?
어쨌든 나는 아이들에게 살구씨를 주고 싶었다. 방바닥 가득 살구씨를 늘어놓고 놀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해마다 씨 가장자리에 조금 남은 과육을 칼로 긁어내고 깨끗이 씻어서 바짝 말려 모았다. ‘마당을 나온 암탉’으로 많은 아이와 어른에게 감동을 준 황선미 작가는 자전적 소설 ‘바람이 사는 꺽다리집’에서 늦가을이면 하얀 은행알에 색색깔 물감을 들여놓았다가 명절이 되면 동네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걸 읽었을 때 아이들을 그토록 정성껏 대하는 문화가 있었다는 것에 깊이 감동했다. 그 때문인지, 어릴 적 워낙 돌멩이로 던지고 집고 받는 놀이를 좋아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살구씨를 나눠주고 싶었다. 그 살구씨들을 이번 가을에 왕창 나눠 주었다. 책 읽기보다는 청명한 하늘과 다채로운 단풍을 즐기기에 좋았던 지난 9일 토요일, 어린이들을 위한 작은 책잔치가 있었다. 그날 감만창의 문화촌 자그마한 마당은 평화롭고 풍요로웠다. 여러 아기자기한 체험 활동은 아이들의 흥미를 끌 만했고, 몇 가지 체험 활동을 하고 나면 받을 수 있는 책도 욕심낼 만했다. 아이들은 적극적이었고, 함께 온 부모들도 호기심 가득한 얼굴이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내가 모았던 살구씨를 나눠줄 수 있었다.
살구씨 몇 개는 물감으로 색을 입히고 몇 개는 유성펜으로 문양을 그려 넣어서 들고 갔다. 그것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며 살구씨로 자신만의 공기를 만들어보라고 했다. 아이들은 자기 손에 맞는 크기의 살구씨를 다섯 개씩 고르고 원하는 색을 칠하거나 그림을 그려 넣었다. 유성펜을 고르는 아이가 많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물감으로 칠하겠다는 아이가 훨씬 많았다. 살구보다 살구씨를 잡은 손가락에 더 물감칠을 하면서도 개의치 않고 물감을 즐겼다. 몇몇 엄마가 실토한 바에 의하면, 집에서는 물감을 자유롭게 쓸 수 없기 때문이란다. 물감을 쓰려면 물통, 붓, 팔레트 등 여러 가지를 준비해야 하는 데다 뒷정리가 번거로워지기 때문에 못 쓰게 한다는 것이었다. 충분히 이해가 되면서도 안타까웠다. 아이들 스스로 뒷정리를 하게 기다리는 것보다 대신 정리하는 게 훨씬 수월하고, 그보다 더 수월한 것은 번거로운 일을 안 만드는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물감을 듬뿍 머금은 붓의 자유로운 움직임과 함께 정신이 넘실거릴 기회를 없애는 것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의문에는 아마도 ‘그래서 미술학원을 보낸답니다’라는 대답이 준비되어 있을 것 같았다.
살구씨가 마르는 동안 다른 활동을 하고 돌아온 아이들은 자기 살구씨를 찾아가기 전에 나와 한판 대결을 벌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공기놀이가 뭔지는 알아도 제대로 할 줄 아는 아이가 없었다. 겨우 다섯 개로 하는 놀이에서 1단계를 무사히 통과하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대결을 벌이는 대신 공기놀이 입문 교육과정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손등에 살구씨를 올렸다가 손바닥으로 받기, 살구씨를 던져올린 후 바닥을 짚은 후 떨어지는 살구씨 받기, 바닥의 살구씨 집고 떨어지는 살구씨 받기 등등. 아이들 대신 왕년의 실력을 발휘해보려고 애를 쓰는 엄마들과도 대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래 잊고 있던 감각이 금방 돌아와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기놀이는 옛날 놀이가 된 지 오래였다. 구슬치기나 딱지치기처럼 이름은 알지만 해본 적 없는 놀이, 몇몇 아이만 맥을 이어가는 놀이, 옛 아이들의 놀이가 되어버렸다. 적당한 높이와 방향으로 던져올리는 것, 바닥의 것을 정확하게 집는 것, 떨어지는 것을 잡아채는 것, 자유롭게 던지고 받는 것, 다음 단계를 개발하는 것 모두 요즘 강조되는 집중력 창의력과 엄청나게 관련이 있음에도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살구씨 다섯 개를 작은 포장 봉투에 넣어 건네며 “가족들이랑 같이 놀면서 연습하고, 내년에 대결 한판하자”고 말했다. 아이들이 집에 가서 몇 번이나 해볼까. 어떻든 나는 내년에도 살구씨를 모을 것이다. 그리고 크게 한판 겨뤄볼 기회를 기다릴 것이다.
동화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