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차이가 문제다. 사회적 갈등은 대개 여기서 비롯된다. 배 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 게 사람 생리이다. 괜한 박탈감 뭐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상대적인 빈곤이다. 개인적으로는 1980년대 청년 시절의 민주화 운동 경력을 밑천 삼아 정치적으로 잘나가는 ‘386 동년배’를 보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는 했다. 만약 그 차이가 개인의 능력이 아닌 주변 여건 때문이라면 이는 사회적인 문제가 된다. 기회가 불평등하면 누구든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때 차이는 계층 갈등을 낳는다. 차이가 큰 사회일수록 삐걱거리는 소리는 더 커진다. 단군 이래 최고의 물질적인 풍요를 누린다는 요즘이지만, 양극화가 최대의 사회적인 문제로 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에다 신분 상승의 사다리마저 사라지고 있는 게 요즘이다.
그래서 조국 법무부 장관은 과거 트위터에서 ‘개천에서 용이 되지 않아도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는지도 모르겠다. 조 장관은 이 글에서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고 ‘10 대 90 사회’가 되면서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확률은 극히 줄었다. 모두가 용이 될 수 없으며, 또한 그럴 필요도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용이 되어 구름 위로 날아오르지 않아도, 개천에서 붕어 개구리 가재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맞는 말이다. 조 장관의 말처럼 하려면 소시민이 작은 행복을 누릴 기회는 줘야 한다. 취업하고 결혼해 아이 낳고, 내 집 마련 걱정은 않도록 해야 하지 않나. 직장을 잃어도 최소한의 삶은 유지하며 새 일자리를 위한 재교육을 받을 기회를 사회가 보장하는 게 기본 전제다. 그래야 세상을 향한 불만은 커지지 않는다. 이를 사회안전망이라고 한다.
한때 참여정부가 롤모델로 삼았던 스웨덴은 어떤가. 스웨덴은 의외로 자산의 격차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상위 1%가 소유한 자산이 전체의 40%가량 된다. 그런데도 소득의 격차는 적고, 사회적인 갈등은 우리보다 심하지 않다. 지상 최고로 불리는 복지 때문이다. 스웨덴 정부는 세출의 30%를 복지에 투입한다. 교육 의료 보육 연금 노인복지 등은 거의 무상 제공한다. 취업률은 완전 고용에 가깝다. 만약 실직하면 1년 동안 월급의 70, 80%씩 준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법. 스웨덴의 복지는 평균 소득의 40% 가량을 세금으로 내기에 가능하다. 간접세와 사회보험료를 합하면 50%에 가깝다. 부자도 마찬가지다. 법인세가 무려 50% 후반대라고 한다. 이래서 소득의 차이가 작다.
스웨덴의 체제는 사회적 대타협 때문에 만들어질 수 있었다. 바로 1938년 잘츠요바덴 협약이다. 우리나라 민주노총에 해당하는 스웨덴 노총과 삼성가쯤 되는 발렌베리 가문이 주축이 된 경제인총연합회는 10여 년에 걸친 협상 끝에 각자의 무기를 포기했다. 노총은 파업과 국유화를, 경총은 직장폐쇄와 소득세 인상 반대를 포기한 것이다. 그 대가로 노동자는 복지를, 기업은 노동시장 안정이란 과실을 따냈다. 물론 사회적 대타협은 정치의 몫이었다. 당시 집권 사민당 정부가 적극 개입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이쯤은 돼야 용이 될 꿈을 꾸지 말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나.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불평등 구조는 위험 수위다. 전체 소득의 47.8%를 상위 10%가, 13.5%를 상위 1%가 차지한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다. 자산 차이는 더 심하다. 10%가 전체 자산의 65.7%를, 상위 1%가 25%를 차지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그런데 기회는 평등하지 않고 사회안전망도 부실하다. 그러니 박탈감에 사회적 불만은 쌓일 수밖에 없다. 삶이 불안하기에 청춘은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 이래서 실업률은 높은데 일할 사람은 부족한 희한한 현상이 생긴다.
이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생존의 문제다. 불평등함을 느낀 이상 그 어떤 이념도 중요하지 않다. 내 밥그릇이 먼저다. 기회를 독점하거나, 과점하는 기득권에 대한 불편함은 곧 적개심으로 변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지배하면 기득권일 뿐이다. 진보든, 보수든. 계층 간 갈등이 심한 만큼 사회 통합은 어려워진다. 요즘 시대정신으로 불평등 해소가 꼽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래서 정치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회 통합을 중재할 리더십 말이다.
이런 면에서 2개월 가까이 이어진 ‘조국 사태’는 걱정이다. 국민은 반으로 나뉘고 사생결단으로 싸울 태세다. 상대를 적폐로 몰아가는 진영논리가 판을 친다. 광장에서는 진영 간 세 대결이 벌어진다. 100만, 200만 명 등 참가자 수 경쟁이 한창이다. 리더십 실종이 초래한 현상이다.
그래서 되짚어본다.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를 위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했는가. 진영논리에 묻혀 시대정신을 잊고 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갈등의 골이 더 깊어지면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 이를 막을 리더십이 절실하다. 정부 여당의 몫이 가장 크다.
논설위원 sbj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