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도 꼭 필요한 결정적 순간에 자리를 비운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지난 1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외교장관회의 갈라 만찬에 불참한 건 부재감이 특히 컸다. 한국과 일본의 경제전쟁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중재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날 오전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이 양자 회담을 가졌지만 현격한 입장 차이만 확인했다. 그대로 두면 일본 정부가 그 이튿날 오전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 우대국)에서 배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위기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이는 폼페이오 장관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불참했고, 결국 화이트리스트 배제 결정은 내려졌다.
지금까지 관례상 ARF 갈라 만찬에는 각국 장관이 전원 참석해왔다. ARF 행사 일정이 몹시 빡빡하지만, 중요 양자회담도 갈라 만찬시간을 피해서 잡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폼페이오 장관은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런 관례를 깨버렸다. 미국은 ARF 개최 전 한일에 ‘분쟁 중지 협정(standstill agreement)’ 체결을 제의한 상태여서 중재를 기대했으나 무슨 일인지 ARF에선 발을 빼버렸다. 이에 대해 미 고위 당국자는 “미국은 중재나 조정에 관심이 없다. 한국과 일본 간의 문제이고, 이런 일이 일어난 것도 처음이 아니다”고 했다. 동맹관계에 대한 회의를 갖게 하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의 경제 보복으로 인한 세계경제 악영향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미국 주요 경제단체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터져나왔고, 한국이 상응 조치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연장 거부를 검토하는 등 후유증이 경제를 넘어 동북아 안보에까지 확산되는 추세다. 가뜩이나 중국·러시아 전투기의 한국 영공 침범으로 동북아 안보가 흔들리는 상황이 아닌가. 그런데도 세계경제, 동북아 안보의 운명을 가를 결정적 순간에 폼페이오 장관은 자리를 비웠다. 그는 그러고서도 화이트리스트 배제 결정이 내려진 뒤 “한미일 관계는 강력하다”고 했다. 우롱하는 느낌이다.
북한의 잇단 발사체 도발에 이르면 미국에 대한 불신은 더욱 깊어진다. 북한은 지난 2일 새벽 함경남도 영흥 일대에서 동해로 단거리 발사체를 2차례 쏘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에 대해 “단거리 미사일이고, 우리는 (북한과 협상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지 않았다. 많은 나라가 이런 미사일 시험을 한다”고 했다. 앞서 지난 5월부터 감행된 4차례의 도발 때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 미 국무부가 단거리 미사일이라고 확인한 지난달 25일 도발 때는 “그들 양측(남북)은 분쟁을 벌이고 있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래 왔다”고도 했다. 북한이 남한을 겨냥한 도발이라고 밝히는 데도 미국을 향해 미사일을 쏘지 않으면 괜찮다고 한다. “전쟁을 하더라도 저쪽(한반도)에서 하고, 수천 명이 죽더라도 저쪽에서 죽지 이쪽(미국 본토)에서 죽지 않는다.” 북미관계가 외교로 전환되기 전인 2017년 그가 했던 말과 별반 다를 바 없다.
탄도미사일은 유엔 안보리 결의 위반으로, 대북 추가 제재의 근거가 된다. 트럼프 대통령도 “유엔 (제재) 위반일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김정은 위원장은 신뢰 위반으로 나를 실망시키고 싶어하지 않는다”며 북한을 두둔한다. 재선을 위한 외교 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묻어난다. 그가 과연 북한 비핵화에 의지를 갖고 있는지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틈만 나면 “(북한 비핵화를) 서두르지 않겠다”고 한다. 기시감이 든다. 그가 싫어하는 오바마 전 대통령의 ‘전략적 인내’ 정책과 닮았다. 비핵화에 느긋한 것과 달리, 잇속 챙기기에는 재빠르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최근 한국에 군수지원비 인건비 등 기존 주한미군 주둔비용 분담금 외에 전략자산 전개를 비롯한 작전지원비까지 부담토록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럴 경우 한국의 분담금이 1조 원대에서 2조 원대로 배 늘어난다. 5배 인상설도 나온다.
미국은 유엔 안보리 차원에서 단행한 ‘이란 핵합의’를 탈퇴한 데서 더 나아가 30여년간 지속된 러시아와의 ‘중거리핵전력(INF) 조약’마저 폐기해버렸다. 모순이다. 북한에겐 비핵화를 요구하면서 자신은 비핵화에 역행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으니 어찌 신뢰하나. 이러니 남한에서 핵무장론이 다시 고개를 드는 건 당연지사라 하겠다. 자유한국당이 2017년 홍준표 전 대표의 ‘전술핵 재배치 및 핵무장을 위한 1000만 국민 서명운동’에 이어 전술핵 재배치를 또 주장하고 나선 건 이런 배경에서다. 미 국방대학 보고서에 기댄 ‘나토 모델의 전술핵 공유’ 주장으로까지 진화했다. 남북한과 일본의 연쇄적인 핵무장을 불러 동북아가 ‘핵 디스토피아’로 전락하는 비극이 어른거린다.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가 불러낸 비극이다.
논설위원 yisg @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