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고종은 종친과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종묘에서 ‘홍범 14조’를 공포했다. 제1조에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밝히고 왕실과 국정사무의 분리, 법률에 의한 조세 징수, 지방관리의 권한 제한,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민·형법 제정 등을 선언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여기에는 제11조 ‘널리 자질이 있는 젊은이를 외국에 파견하여 학술과 기예(技藝)를 익히도록 한다’, 제14조 ‘문벌을 가리지 않고 널리 인재를 뽑아 쓴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마침내 조선이 근대국가로의 변모를 선포한 것이었다.
이미 조선사회는 실학, 동학농민운동을 통해 개혁의 욕구가 분출되고 있었다. 정부도 김홍집 박영효 등 개혁인사를 불러 노비제 폐지 등 갑오개혁을 시행하고 ‘홍범14조’를 반포한 것이다.
서구 선진문물을 배워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야심찬 인재육성 방안도 마련됐다. 1895년 정부는 치열한 경쟁을 통해 일본의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보낼 관비 유학생 150여 명을 뽑았다. 유학생비로 학부 예산의 3분의 1을 배정할 정도로 거대한 국가사업이었다. 학부대신 박정양은 “여러분은 각과에 나뉘어 실용 사무를 실심강구하여 지식을 넓히고 사리를 깨우쳐 의연한 정신으로 독립 문명한 세상의 필요에 응하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해 4월 26일, 본진 113명이 인천에서 배를 타고 부산 나가사키 고베를 거쳐 기차로 도쿄 신바시역에 도착했다. 이들은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다시 도보로 게이오의숙에 입교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이들은 개화의 주역으로 활용되지 못했고 조선은 스스로 변화할 기회를 잃었다.
박태원의 ‘낙조’라는 소설에는 최초의 유학생 출신 관비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조선은 유학생 지도를 게이오의숙 창업자인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맡겼다. 당시 게이오의숙은 서양 과학지식을 몸에 익힌 일본 근대화의 인재들을 배출하고 있었다. 후쿠자와는 조선 유학생을 전부 면담하면서 일일이 지망을 물어봤다. 한 명도 빼지 않고 모두 ‘관직’을 지망한다고 했다.
후쿠자와는 사농공상 가운데 농공상 세 가지가 나라를 흥하게 하는 근본인데, 100여 명 중 한 명도 예외 없이 모두 그렇게 대답할줄 몰랐다며 실망감을 표했다고 한다. ‘정부관리로의 출세’, 조선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들마저 이런 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들이 보통과에서 수학하던 중 국내에 정변이 일어났다. 하루아침에 정권이 바뀌어버린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생기고 고종이 러시아대사관으로 옮겨가면서 김홍집은 참살당하고 박영효는 국외로 도피했다. 그러자 김홍집·박영효 정부 때 파견된 이들은 ‘역적이 파견한 유학생’으로 적패의 대상으로 몰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결국 절반 이상이 공부를 내팽개친 채 서둘러 귀국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관료의 꿈이 깨지자 나머지 유학생들은 각자도생의 길을 찾았다. 결국 게이오의숙 보통과를 졸업한 유학생 중 61명이 상급학교에 진학하면서 공학 농학 의학 항해학 군사학 측량학 경제학 등 다양한 실용학문을 진로로 선택했다. 정부는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이 인재들을 핵심 요직에 중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학교 기업 기술 업종 등에서 우리나라를 근대화하는 데 나름대로 소임을 다했다. 예컨대 국내에 서구 경제학을 처음 소개한 것도 바로 유승겸 신해영 등 첫 관비 출신 유학생들이었다.
1881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선진 서구문물을 배우기 위해 김윤식을 영선사로 삼아 기술연수생을 중국에 보냈다. 이들은 텐진기기국에 파견돼 선진무기 제조술과 전기 화학 제도 등을 습득하게 했다. 그러나 69명의 일행 중 절반이 중도 귀국했고 나머지도 임오군란으로 정권이 바뀌자 모두 공부를 포기하며 돌아왔다. 이들은 기기창 창건에 기여하지만 정부는 이들을 더는 적극 활용하지 않았다.
정권은 시류에 따라 바뀐다. 그러나 인재는 국가의 백년대계다. 정권이 인재를 줄 세워도 안 되고 인재도 정권에 줄 서서도 안 된다. 편 가르지 않고 인재를 아끼고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것은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