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멕시코 국경도시 티후아나에서 한국인 기자가 찍은 사진 한 장이 미국 사회를 흔들었다. 사진 속 여인은 어린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황급히 달려간다. 두 아이는 모두 기저귀 차림에 한 아이는 맨발, 한 아이는 슬리퍼를 신고 넘어지기 일보 직전이다. 이들의 한 발짝 뒤에는 최루탄 가스가 솟아오르고, 저 멀리 국경 철조망이 보인다. 일명 ‘캐러밴’으로 불리는 중남미 출신 난민 행렬이 미국 접경지에 이르자 최루탄을 쏘아대는 미국 경비요원에 의해 난민들이 대피하는 광경이다.
이 사진을 보면서 40여 년 전 AP통신 사진기자 ‘닉 우트’가 포착한 ‘네이팜 소녀’가 떠올랐다. 베트남전쟁 당시 네이팜탄 폭격으로 온몸에 화상을 입고 벌거벗은 채 뛰쳐나오는 한 소녀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당시 전 세계 대부분의 신문 1면에 실리며 베트남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2018년의 ‘캐러밴’도, 1973년의 ‘네이팜 소녀’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긴박한 현장감과 참혹함을 전한다. 단 한 장의 사진으로 말이다.
때로는 길고 빼곡한 글이나 몇 시간짜리 영상보다 정지된 사진 한 장이 내뿜는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앞서 말한 캐러밴 사진이 미국 사회의 반전 여론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도 그 이미지가 내포한 무언의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트럼프 대통령은 “많은 갱 조직원과 나쁜 사람이 그들(캐러밴) 중에 섞여 있다. 이는 미국에 대한 침략이다”라며 연일 캐러밴에 대한 엄포와 반이민정책을 펼쳐왔지만 사진 속 세 모녀의 모습은 트럼프가 주장하는 ‘폭력적 난민’ 이미지와 달랐다. 그저 가엾고 안타까운 우리 이웃의 모습이었다.
이처럼 사진은 장문의 기사만큼이나 강한 호소력을 가진다. 퓰리처상 수상작인 ‘독수리와 소녀’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 사진을 통해 기아와 전쟁의 참상이 전 세계에 전해졌다. 이 때문에 사진을 찍기보다 소녀를 먼저 구했어야 했다는 기자 윤리에 대한 논란은 오늘날까지 그 의견이 분분하다. 결국 비난의 화살에 해당 사진가 케빈 카터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비극적인 결말에 이르기까지 단 한 장의 사진이 수많은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좌지우지한 것이다. 사진이라는 언어의 독립적인 힘과 무게는 감히 무시할 수 없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 언론은 사진 한 장의 호소력보다 기사의 신속성이 더 우선인 듯하다. 한 장 한 장의 사진에 더 의미 있는 스토리를 담기에는 아무래도 시간과 지면의 제약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짜임새 있는 글일지언정 현장의 상황과 감정이 독자에게 와닿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듯, 우리 언론도 세상을 관찰할 여유가 필요하다. 신속한 보도와 별개로 ‘생각하게 만드는 사진’에 좀더 시간이 쓰였으면 한다.
집회 현장을 예로 들어보자. 사진에 담긴 내용이 단순히 집회가 진행됐음을 알리는 수준에 그친다면 그것은 구태의연하다. 보도사진의 개념을 그저 ‘증거’ 용도로 확정 짓지 말고 더 가까이, 더 오랫동안 현장을 들여다볼 만한 취재 환경이 마련됐으면 한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포토뉴스를 통해 독자들이 현장감을 그대로 느끼고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지난달만 해도 다양한 집회 행사 사진이 국제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앞으로는 색다른 시각과 통찰력으로 신문을 통해 현장감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현재 우리나라 대부분의 언론이 종합뉴스통신사인 ‘연합뉴스’에서 제공하는 이미지와 기사를 유료로 활용하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그것이 뉴스통신사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역할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안일해지지 않았으면 한다. 일정한 기획과 여유를 갖고 촬영한 사진만이 줄 수 있는 감동의 기회를 계속 놓친다면 그것 또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진은 시각언어이다. 요즘 시대에 ‘신문을 본다’라는 말은 단순히 기사를 읽는다는 뜻이 아니다. 글과 더불어 신문에 보이는 이미지 하나하나가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우리 것을 생각해보게 한다. 앞으로 국제신문을 비롯한 우리나라 모든 신문이 ‘보는 신문’으로서 우리에게 전해줄 소중한 메시지들을 기대해본다.
경성대 4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