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입니다. 앙금 같은 뼈를 드러낸 무수한 나무 곁에서 핏빛 단풍잎과 노란 은행잎이 부서져 번진 햇빛보다 황홀하게 빛나는 계절. 혹시 제게서 오래된 시골길 흙냄새나 들풀향이 풍기지 않나요. 와인 빛 낙엽 수북이 깔린 그 산사 거리에 잠시 등을 붙이다 왔거든요. 당신을 떠나 이리저리 헤매면서 저의 몸과 마음은 나달나달해졌습니다. 지친 몸과 마음을 바위 위에 잠시 내려놓으니 계절을 휘감은 바람이, 제 등에 새겨진 녹록지 않은 세상의 무게를 비웃듯 이야기 한 자락 펼쳐놓더니 낙엽을 한 움큼 쓸어안고 유유히 사라지네요.
코가 닳고 눈썹이 쓸려 나간 돌 형상이 곳곳에 서 있는 이곳은 남쪽의 어느 절입니다. 무심한 돌 형상을 향해 사람들이 손 모아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읊조리듯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는 듯합니다. 지금은 그 이름도 무색하지만 제 모습이 반듯할 때 사람들은 저를 ‘신문’이라 불렀습니다.
애초 저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처럼 무역이 발달한 지역에서 발행되었는데 장사하는 이들의 편리를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배들이 싣고 오는 물품 목록을 작성해 공개하다 보니 많은 사람이 애용하게 되었고 우리 세상살이의 새로운 소식들로 지면이 점차 확장된 것이지요. 멀리 있는 사람과 물자를 연결해 주고 생활에 도움 되는 정보들이 한가득 실렸으니 사람들에게 무척 유용하게 사용됐겠지요. 편리하고 유위한 저를 많은 사람이 찾게 되면서 간격이 있던 발행 시기도 바뀌어 매일 발행하게 되었고요.
넘치는 정보와 새로운 소식으로 사랑받던 제가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 마음을 우울하고 황폐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어느 날 문득 바닷속으로 사라진 아이를 잃고 울부짖는 어머니의 눈물에 눈시울을 붉히던 당신 모습이, 한때 사랑했으나 이제는 헤어져 살인자와 피해자가 된 부부 이야기에 몸서리치던 당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런 아름답지 않은 소식을 등에 가슴에 올리고 당신을 마주했을 때 저는 활활 타오르는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조금 전 바람이 들려준 이야기를 당신께 전합니다. 갑자기 시력을 잃은 어느 여자가 있었습니다. 여자가 외출하면서 남편에게 동행해줄 것을 부탁했답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한마디로 거절했습니다.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말과 함께. 마음을 몹시 다친 그녀는 일이 있을 때마다 혼자 외출했고 두 번 다시 남편에게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다니는 길과 교통편이라 불편하지도 않았고 남편이 아니어도 그녀 앞에 장애물이 나타나면 누군가 말 없이 손으로 제지해 주었으며 무거운 물건을 들어주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운전석 뒷좌석에 앉은 그녀를 향해 버스 기사가 말했습니다. “부인은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놀리시는 건가요. 앞이 보이지 않는데. 단 한 번도 저와 함께 외출하지 않는 남편을 둔 여자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니 원.” 그러자 버스기사가 깜짝 놀라 부인을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아니 부인, 항상 당신 뒤에서 조마조마하며 뒤따라 다니는 남자가 남편 아니십니까.”
건강이 좋지 않았던 남편은 자신이 죽고 난 뒤에도 부인이 혼자 생활할 수 있도록 연습을 시킨 것입니다. 항상 뒤따라 다니며 장애물이 나타나거나 위험한 상황이 되면 말없이 도와주면서요.
제가 전해드린 황량한 소식으로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깊은 당신, 바람의 이야기로 잠시나마 위로를 삼으시기 바랍니다. 여자의 남편처럼 사람들 마음속에 숨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웅숭깊은 우물도 들여다보시기를, 그러시기를 바랍니다. 돌에 간절한 염원을 담아 새긴 형상이 오랜 세월 거치면서 정령이 깃들고 누군가의 마음을 다독이게 되기까지 세월의 녹을 어찌 다 가늠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제 염원도 오랜 세월 거듭되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아름답지 않은 소식도 알려야 되는 제 숙명을 당신만이라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침에 눈 뜨면 제일 먼저 제게 손 내밀고 오래도록 눈길 거두지 않는 당신. 항상 당신 입가에 미소 걸릴 소식만 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불가능한 일이라 해도 온화하고 다정한 소식만 들려드릴 수 있는 날을 언제나 기원합니다. 오늘도 당신의 안녕을 기원하며….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