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곧 힘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다. 시간이 없다면 세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변화다. 시간이, 변화가 생명을 순환시키는 것이다. 그러니 시간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다. 그 힘은 물론 생명이라 이름해도 틀리진 않을 것이다.
어쨌든 시간은 세상을 굴리는 작동 원리이다. 세상의 그 어떤 문제도 시간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는 해결되지 않는다. 갈 길 멀다고 서두르면 얼마 가지 못해 주저앉게 돼 있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는 그냥 우화가 아니다. 길게 보면 세상사 이치를 담은 것이다. 아무리 급해도 뜨물이 아이가 되지는 않는다. 원인이 있고, 기다림이 있고, 그런 시간 속에 새 생명은 탄생하는 것이다.
시간은 또 선택을 수반한다. 선택은 자유의지가 아니다. 스스로 내리기는 한데 새로운 상황에 대한 반응이라는 점에서 수동적이다. 곧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적응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제대로 적응하면 적자가 될 것이다. 물론 적응 못하면 순환의 수레바퀴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다.
오락가락, 25년이었다. 북핵을 둘러싼 우리의 선택은 그렇게 허방을 돌렸다. 노태우 정권은 1991년 12월 북한과 남북 기본합의서를 채택하고 이의 연장 선상에서 이듬해 2월 남북 비핵화선언을 정식 발효시켰다. 비핵화 원칙은 10개월 만에 북한의 기피로 유야무야됐지만 남한은 지금까지 그 원칙을 견지하고 있다.
1993년 3월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불거진 1차 핵 위기 때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돼 가닥을 잡아가는 듯했다. 이듬해 7월, 남북 정상회담을 불과 10여 일 앞두고 김일성 주석이 급사했다. 사인을 두고 강경파와 온건파의 충돌이라느니, 핵 개발 관련설이 무성했다. 김일성 사망 3개월 뒤 미국과 북한의 제네바 회담 합의로 북에 경수로를 건립하는 사업이 시작됐으나 15억 달러 이상의 비용만 날린 채 2006년 중단돼 버렸다. 바통을 이어받은 6자 회담도 시간만 허비한 채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다시, 2017년이다. 한반도 비핵화 선언 25년 만에 전술핵 재배치 논란이 뜨겁다. 미국의 전술핵이 한반도에 배치되면 비핵화 선언은 끝이 난다. 한국이 원하면 언제든 좋다는 미국, 재배치 필요성을 제기한 국방부, 전술핵은 안 된다는 청와대와 여당…. 보수 언론은 국민 여론을 들어 전술핵 배치를 압박하고, 자유한국당은 예산까지 반영하겠단다. 졸지에 청와대와 여당만 고립된 섬이 될 판이다.
아이러니다. 남북 교류, 비핵화는 모두 보수 진영에서 시작됐다. 박정희 정부의 7·4남북공동성명, 노태우 정부의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이 보수 정부서 이뤄졌다. 그걸 이어 받은 게 6·15와 10·4 공동선언이다. 한데, 지금 비핵화를 공중분해 시키려는 곳도 보수당이다. 예정대로 김영삼-김일성 회담이 이뤄졌다면 어땠을까. 김대중 정부 때 이뤄진 6·15 남북 공동선언은 아마도 김영삼 정부 몫이었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낮은 단계 연방제’보다 더 과감한 조치가 담겼을 수도 있다.
북핵 문제는 6차 핵실험일인 지난 3일이 분수령이다. 북한 핵이 단순히 가능성의 시대에서 현실화 시대로 이행한 것이다. 북핵은 일거에 세상을 바꿔버렸다. 북한이 변할 것이란 기대는 종적없이 사라졌다. 불편하고 언짢은 일이지만 핵을 짊어진 북한과 당분간 공존해야 할 상황이다.
중국과의 앞날은 더욱 곤혹스럽다. 사드 보복으로 관련 업체의 시가 총액이 20조 원이나 증발됐다고 한다. 관광, 유통업을 필두로 화장품, 문화콘텐츠, 자동차 산업의 피해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유엔 안보리의 북핵 제재를 둘러싸고 마찰이 계속되면 피해는 눈덩이다. 여기에다 한술 더 떠 전술핵을 배치한다? 중국과의 교역을 중단한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엄청난 경제적 파장을 겪어야 하는데 과연 그럴 가치가 있는 것인가.
북한이 핵을 업고 으르딱딱거리는 이 시점에도 문제의 핵심은 역시 경제다. 경제의 관점에서 전술핵은 피해야 할 카드다. 중국은 물론 러시아와도 어려움이 예상된다. 야권 일각에서 나오는 핵무장은 생각할 가치도 없다. 석기시대로 돌아갈 각오가 돼 있으면 또 모를까. 정말 막판에 다다르면 그때는 도리가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 상황에선 정권 흔들기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결국은 돌고 돌아 제자리다. 우리가 지금 가진 것이라곤 25년간 견지해온 비핵화뿐이다. 오랜 시간 고민한 결정체가 그것이다. 우선은 명분에서 앞서고, 대북 제재 여론을 모으는 데도 효력이 있다. 비핵화를 버리고 핵 대결의 길로 나선다고 가정해 보라. 힘과 힘이 맞부딪히는 그곳에 우리 한국이 설 자리는 없다. 세상을 변화시킬 힘이 모자란다면? 그때까지 참고 버티는 수밖에 더 있을까 싶다.
논설고문 aiwi@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