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묵부답이다. 세상이 온통 시끌벅적하다. 한데도 여전히 묵언 수행이다.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그런 것인가. 정치 인생 7년 만에 답답한 상황에 접했다. 그래도 입을 굳게 닫고 있다. 침묵은 아무 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아니, 묵시적 동의로 간주될 수도 있다. 모두들 그의 입을 쳐다보는데 굳게 닫힌 입은 열리지 않는다.
안철수. 그의 정치 인생 3막의 끝 부분이다. 2010년 서울시장 선거는 서곡이었다. 박원순 후보에게 자리를 양보한 뒤 일약 대선 후보로 도약했다. 대권 후보 지지도 1위를 달릴 때가 1막1장, 후보 사퇴가 1막2장 정도 된다. 이어 민주당과 통합이 2막1장, 통합민주당을 탈당해 4·13 총선에서 제3당을 차지한 게 2막2장이었다.
호남지역을 싹쓸이하며 지역 기반을 다졌다. 문제는 오름세가 가팔랐다는 사실. 너무 빠른 하이라이트였을지도 모른다. 3막이 하이라이트여야 무난했을 텐데…. 5월 9일, 보궐선거로 치러진 19대 대선에서 어려움에 봉착했다. 득표율 21.4%로 3위에 그친 것이다. 총선으로 날아오르던 기세가 대선에서 이어지지 못했다. 3막이 시작되자마자 하향 곡선을 마주한 셈이다.
가뜩이나 새 정부 들면서 발밑이 허전하다. 호남 인사 중용, 5·18 기념식 대통령 참석과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국가보훈처장 사표 수리, 전남도청 헬기 사격 조사 약속…. 새 정부의 호남 올인 정책은 지방선거, 총선을 넘어 다음 대선까지 겨냥한 포석이 아닐까 한다. 상대적으로 안철수 전 대표의 입지가 비좁아졌다. 그런 상황에서 증거조작 사건이 불거져 3막2장이 아슬아슬하다.
자, 이제 어찌 할 것인가. '국민도 속고 국민의당도 속았다.' 국민의당 박주선 비상대책위원장이 한 말이다. 증거조작은 이유미 당원의 단독 범행이라는 이야기. 당의 진상조사단은 조사를 통해 안 전 대표가 사전에 관련 사실을 몰랐다고 밝혔다. 안 전 대표는 당시 대선 주자였고 지금도 국민의 신망을 받는 정치인이다. 그 정도 위상이면 당연히 공식적으로 해명할 필요가 있다. 그게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는가 싶다.
이러든 저러든 대선 당시 안철수 후보는 당의 정점이었다. 이유미는 제자였다 하고 총선 출마 후보였다. 조작된 증거물을 당에 전달한 이준서 전 최고위원은 안 후보가 영입한 인재라고도 한다. 이래저래 관계 맺음이 있다.
'아빠가 얘기를 해서 어디에 원서만 내면 된다고 얘기했던 것 같은데. 아빠가 하란 대로 해서 했었던 걸로 나는 그렇게 알고 있었어.' 국민의당이 문준용 씨의 녹취록이라며 증거물을 제시한 것은 대선 나흘 전인 5월 5일. 다수의 제보자로부터 확인한 내용이라고 했다. 당 지도부는 문준용을 문유라라고 지칭하며 정유라에 대비시켰고 거리에 나서 시위까지 벌였다.
그랬었는데…. 이제 와서 시일이 촉박해 제대로 검증하지 못했다고? 이유미의 단독 범행이라고? 조사 결과니 수긍해야 겠지만 국민이 그걸 납득할까 싶다. 대선이라는 중차대한 국가 대사에서, 그것도 선거운동 막바지의 폭로전이었다. 결정적인 증거물을 제시하면서 검증도 안 해봤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
물론 사건의 전말은 수사를 통해 밝혀질 것이다. 이유미가 왜 꼬리 자르기 이야기를 하면서 억울함을 호소했는지 드러날 것이다. 가담자는 법에 의해 처벌되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바로 신뢰의 문제다. 선거 때마다 폭로전은 있었지만 이번 같은 경우는 유례를 찾기 힘들다. 후유증이 극심할 텐데 입증도 안 된 증거물을 폭로한다?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대선 후보와 당이 조작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치자. 그러면 아무런 죄도 없는 것인가. 법적으로야 무죄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정치적, 도의적 책임조차 무죄가 되는 건 아니다. 정치인이라면 말에 대한 도의적 책임이 법적인 유무죄보다 결코 가볍지 않다.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는 그런 사람이라면 정치인으로서 금치산자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정치인의 말은 스쳐지나는 바람 소리가 아니다. 한마디 한마디가 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말은 의사 전달의 도구일 뿐만 아니라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한 사람의 생각과 인격과 품위가 그 속에 고스란히 담긴다. 달리 말하면 말이 곧 사람이다. 그러니 말은 돌에 새기듯 해야 한다. 말 한마디가 천금의 무게에 해당된다는 옛말은 허투루 한 말이 아니다. 자기 말에 책임을 지지 않는 그런 사람이라면 정치인으로서 자격 미달이다.
'얼음 위에 새긴 약속'이란 말이 있다. 말부터 뱉어놓고 실행이 뒤따르지 못하는 경우다. 얼음에 글자를 새겨 보라. 새 정치니, 개혁이니…. 그런 약속은 얼음이 녹으면 가뭇없이 사라진다. '눈 위에 새긴 발자국'은 또 어떨까.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은 하나의 선례가 되어 악순환을 초래할 수 있다. 무신불립이다. 신뢰를 잃고서야 어찌 홀로 설 수 있겠는가.
논설고문 aiwi@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