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스트레스 테스트(stress tests)라는 게 있다. 중대 사고를 야기시킬 수 있는 극한 상황에서 원전이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는지 안전도를 평가하는 시험이다.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 폭발사고 이후 유럽연합(EU) 15개국에서 시행한 바 있고, 국내에서도 고리1호기, 월성1호기에 대해 실시했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 사항이었을 만큼 예민한 관심사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원전 자체에 대한 스트레스 테스트와 달리, 부산 울산 경남 주민들은 요즘 엄청난 '원전 스트레스'를 겪고 있다. 원전 스트레스는 무색·무미·무취의 방사능처럼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든다. 잊을 만하면 스멀스멀 떠오르고, 뿌리치면 칠수록 의식을 옥죈다.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시민들은 지진 얘기만 들어도 움찔한다. 이상한 가스냄새와 해변의 개미 떼를 보고 지진 전조가 아닐까 의심한다. 괴담이 떠돌고 불안감이 씻기지 않는다. 모두 원전 스트레스다.
스트레스의 진원지는 기장 고리 지역이다. 이곳에는 현재 고리 원전 1, 2, 3, 4호기와 신고리 원전 1, 2, 3, 4호기가 가동 중이거나 시험운영 중이다. 여기에 지난 6월말 신고리 원전 5, 6호기 건설이 추가 확정됐다. 이로써 고리 지역에는 곧 총 10기의 원자로가 들어선다. 단일지역 세계 최대·최다이다. 원자로 수로서나 시설용량 면으로나 세계 원전 역사에 획을 긋는 사건이다. 게다가 원전 반경 30㎞ 이내 주변 인구가 340만 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다.
진짜 문제는 고리의 악명이 아니고 현실적으로 닥칠 수 있는 위험·위기 인자다. 지진, 해일, 대홍수, 내부 실수, 외부 공격 등 스트레스 테스트로 제어할 수 없는 사고 요인이 많다는 얘기다. 어떻게 보면 경북 성주에 설치키로 한 사드보다 고리 원전이 더 중차대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지난주엔 아닌 밤중에 홍두깨같은 '핵 폭탄'이 투하됐다. 정부가 고리 원전에 고준위 핵 폐기물 저장시설을 세우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임시라는 전제를 달았지만 응기응변 논리로 비친다. 사용후핵연료에서 나오는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은 수만 년 동안 방사선을 배출하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더러운' 쓰레기다. 고준위 핵 폐기물의 경우 후쿠시마는 600t인데 반해 고리 원전은 2153t으로 3.6배나 많다.
정부는 지역민의 위험과 불안, 희생이 따를 수 있는 중대한 사업을 결정하면서 지역의 의사 반영은커녕 의견수렴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마디로 지역을 우롱하고 무시한 처사다. 지역민을 무슨 '가마니때기'로 여기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결정을 연이어 내릴 수 있는가. 교육부의 한 고위 관료가 말한 것처럼 '민중, 아니 부울경 주민들을 개 돼지'로 본 것인가. 지진 가능성이 상존하는 곳에 세계 유례없는 다수호기를 앉히고 핵 쓰레기장까지 떠안긴 건 지역 행복권을 짓밟는 국가폭력에 다름 아니다.
고리1호기 폐쇄 결정(2015년 6월) 후 탈핵(脫核)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원전해체센터라도 들어섰으면 하는 지역의 기대감은 보기 좋게 사라졌다. 지자체, 주민, 환경단체, 지역 정치권이 일제히 반발하고 있지만, 정부는 물러설 기미가 없다. 학계와 환경단체에서 탈핵을 부르짖고, 절전운동을 내세우며 에너지 정책 전환을 촉구하고 있지만, 정부의 원전 드라이브는 요지부동이다. 오히려 원전 마피아들이 지키는 한국의 원전 철옹성은 더욱 공고해지는 모습이다. 사드에 국민적 시선이 쏠려 있는 틈에 추가 원전과 핵 쓰레기장의 깃발을 꽂는 저 기민함을 보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난 23일 부산 YMCA에서 열린 '신고리5, 6호기 백지화를 위한 탈핵 만민공동회'는 볼멘 아우성과 함께 대처 방안을 논의한 의미 있는 자리였다. "정부가 부산을 멸시한다" "부울경 주민을 진짜 개 돼지로 보는 것 같다" "탈핵을 위해선 강력한 절전운동이 필요하다" "국회에서 쟁점화하자" "전국적 연대로 국민투표를 발의하자" "내년 대선 때 심판하자"….
신고리5, 6호기는 탈핵운동의 시금석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저지하면 원전 드라이브가 꺾일 것이고, 허용하면 신고리7, 8호기까지 각오해야 한다. 이 무더운 날씨에 원전 문제로 사사건건 정부와 물리적 충돌을 빚는 건 짜증나는 일이다. 그렇지만 지역민들이 결의하고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돌아올 게 없다. 거대한 정치 지렛대가 작동되지 않는 한 정부는 꿈쩍도 않을 분위기다. 판을 넓게, 크게, 깊이 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전 국민이 참여하는 국민투표는 괜찮은 카드다.
탈핵은 어쩌면 국가의 운영 틀을 바꾸는 문제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투입된 복구비가 133조 원이라고 한다. 대부분은 국민세금이다. 후쿠시마 사고의 트라우마는 부울경 주민들에게도 스트레스다. 이제 대통령의 생각이 바뀔 때도 됐다. 부울경 800만 주민들은 명확한 표를 통해 탈핵으로 가는 길, 원전으로부터 안전과 자유를 얻는 지역행복 티켓을 예약해야 한다. 대선이 내년이다.
대기자 chpark@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