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황제 조훈현 9단의 일화 하나. 부산시와 국제신문이 주최하는 제1회 부산시민바둑대회가 열린 1999년 사직체육관 특별대국실. 주최 측을 대표한 고 안상영 부산시장과 한국기원 기사 대표인 이창호 9단 간의 명사대국을 앞둔 시각. 조 9단이 이 9단에게 웃으며 말한다. "창호야, 살살해야 된다. 팍 이겨버리면 안 돼. 이건 프로 대국이 아닌 거 알지?" 조 9단은 순진한 제자 이창호 9단에게 속칭 '접대 바둑'을 권하고 있는 거다. 쓰다 달다 말이 없던 이 9단은 고 안 시장에게 4점을 깔아주고 열심히 바둑을 둔다. 계가 결과는 이 9단의 1집 패. 조 9단은 "역시 신산(神算)이야" 한다.
제2회 부산시민바둑대회 명사대국은 고 안 시장과 조 9단의 대결. 대국 시작을 앞두고 조 9단은 동료 기사들에게 너스레를 떤다. "아, 큰일 났네, 1집을 어떻게 맞추지?" 부산 출신의 김종준 6단이 "조 국수, 1집은 왜?" 하고 하고 묻자 조 9단이 말한다. "알잖아, 작년에 창호가 딱 1집을 맞췄잖아(져 줬잖아) …." 져주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딱 1집에 맞춰 지는 것은 아무리 프로라도 쉽지 않은 일. 게다가 이 9단과 비교될 게 뻔하니 단순한 접대바둑 이상의 고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계가 결과는, 조 9단의 1집 패. 역시 바둑황제라는 탄성이 절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2006년 제8회 부산시민바둑대회 명사대국에서 조 9단은 이권상 행정부시장을 5점 접바둑 상대로 맞았다. 조 9단의 손바람이 초반부터 반상을 휩쓴다. 관전자들은 '조 9단이 이번엔 아예 이기기로 작정했구나' 생각할 정도. 결과는 예상대로 조 9단의 승. 다만, 1집 차이라는 것이 의도적이라는 느낌을 갖게 했다. 그런데 정작 조 9단은 복기를 하며 능청스럽게 "아, 계가를 잘못했어, 요즘 왜 이렇게 계가가 안되지" 하는 게 아닌가.
조 9단이 정치권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 새누리당이 조 9단 영입을 추진하고 있으며, 비례대표를 제의했다고 한다. 조 9단은 "문화·스포츠 분야에서 할 일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해 마음이 없지 않은 것 같다. 정치 9단들에게 9점을 깔고 시작하겠다는 각오도 내비쳤다고 한다. 조 9단이 바둑으로 세계를 제패한 인재임은 분명하다. 또 바둑의 철학과 기술은 정치의 이데아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정치는 다르다. 조 9단이 접바둑 상대를 마음대로 요리하듯이, 정치판에서는 자신이 9점을 깐다고 해도 정치 9단의 수를 읽어내기 어려울 것이다. 입신의 경지에 든 바둑황제가 정치라는 바둑판에서 9급을 전전하다 폐석으로 버려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조 9단은 계가를 잘해보기 바란다.
조송현 논설위원 pin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