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량'의 엔딩 장면이 떠오른다. 전투가 끝난 뒤 들판을 거닐던 이순신이 아들 회에게 전투의 승리를 천행(天幸)이라 말한다. 천행은 하늘이 내린 행운을 뜻한다. 회는 돌진하던 적선이 대장선을 비켜가게 한 그 소용돌이를 예상했느냐고 묻는다. 이순신은 "백성이 날 구한 것이다"며 "백성과 소용돌이 중 어느 것이 더 천행인 것 같으냐"고 되묻는다. '난중일기'에는 명량대첩을 가리켜 '이것은 참으로 천행이다'고 적혀 있다. 이순신과 아들 회의 대화는 영화적 상상이지 싶다. 역사적 정황을 보건대 이순신은 백성을 위하는 지극한 심정으로 싸웠고, 결국 그 백성의 도움으로 승리했으며 이를 천행으로 여겼다고 짐작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주역은 민초, 즉 백성이었다. 왜군에 의해 20일 만에 도성이 함락되고 임금마저 궁을 버리고 떠난 풍전등화의 조선에 승전보를 전한 주역은 백성들로 이뤄진 의병이었다. 해상의 이순신과 육지의 의병들이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왜국의 속전속결 전략을 무너뜨리고 결국 승전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의병의 활약에 반색하던 선조는 명나라 지원군이 오자 표변한다. 의병을 관군으로 흡수시키거나 강제 귀농시킨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사실상 의병을 해체한 것이다. 더구나 전국 의병의 수장인 김덕령 장군을 반란혐의를 씌워 죽여버린다. 그와 절친했던 홍의장군 곽재우는 이런 낌새를 미리 알고 은둔에 들어갔고, 다른 의병장들도 의병을 해산하고 모습을 감춰버렸다.
정유재란 당시 대표적인 '백성의 전쟁'인 황석산성 전투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본격화된다는 소식이다. 경남 함양군이 29일 황석산성역사찾기운동본부 창립총회를 갖고 활동에 들어간 것. 황석산성 전투는 정유재란 당시 안음현(현 함양군 안의면 일대)과 거창현, 함양군 등 7개 군현의 백성·관리·관군·부녀자 등 7000명이 10배가 넘는 왜군과 활·칼·창·돌로 맞서 싸운 전투다. 관리와 백성의 옥쇄로왜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혀 사실상 정유재란을 종식시킨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으나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지금 들어도 숙연해지는 황석산성 전투가 역사 속에 잊혀진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정유재란이 끝난 해 11월 경상도 관찰사 이용순이 장계를 올렸듯이 이제라도 백성의 전쟁을 제대로 조명해 애국심과 국민통합의 역사적 교훈으로 삼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