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긴 터널 밖에는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 대한민국 피란수도 1023일. 한국전쟁의 피란유산은 냉전기 세계 최초 대규모 전쟁의 세계사적 유산이다. 전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더구나 그 전쟁은 아직도 미완이다. 세계평화라는 미래적 함의를 담은 연대기적(chronological) 가치가 있다. 한국전쟁기의 피란수도 자산은 유일성, 장기성, 독특성, 융합성, 포용성의 문화적 가치가 있다. 이는 유네스코가 추구하는 '인류의 중요한 가치의 교류'와 '특정 유형의 경관'을 충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피란수도의 건축·문화자산은 유네스코 유산으로 등재할 가치가 충분하다.

그동안 한국전쟁기의 부산은 임시수도라는 지극히 행정편의적 표현으로 불리어 왔다. 임시(provisional)라는 표현이 주는 암묵적인 서울중심주의에 우리 모두가 동조자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부산은 명실상부한 피란수도였다. 1950년 7월 2일. 전쟁 발발 일주일 만인 이날 부산항 보급창 부두로 이승만 대통령 일행이 도착한 이래, 그해 8월 18일부터 부산은 대한민국의 최후의 보루이자 실질적인 수도였다. 당시 정부는 지금의 동아대 부민캠퍼스 자리에 있던 경상남도청을 정부종합청사로 정했다. 비록 전시지만 두 차례에 걸친 통화 조치 등을 단행하는 등 국가행정업무의 중심이었다. 또한 지금 임시수도 기념관인 당시 도시자 관사를 부산경무대로 정하여 대통령의 거처로 삼았다.

정치적 공과의 논란은 별개로 하더라도, 당시 이 대통령은 38선 단독 돌파 명령, 평화선 선포, 자유당 창당 등 역할을 수행했다. 정치파동, 발췌개헌안 등으로 상징되는 국회는 도청의 무덕관과 부산극장을 의사당으로 삼아 피란정치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법원도 형법, 형사소송법 등 국가 형법제도의 틀을 갖추는 등 국가 3권기구의 기능이 부산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이들 국가기관뿐만 아니라 대청로의 전차 노선을 따라 한국은행, 미국 공보원에 합류한 각국 대사관, 중앙관상대, 부산방송국, 상공회의소, 제3육군병원 등 다양한 정부 지원 기능이 작동함으로써 대청로는 명실상부한 국가 상징 가로를 형성했다. 전시연합대학이 개설된 부민관 및 인근 중고교 교사, 심지어는 개인 법률사무소까지 빌려쓴 고등교육 기능의 산재도 빠트릴 수 없다.

용두산과 복병산 자락을 중심으로 문화예술과 종교 기능이 형성됐다. 국립국악원, 중앙성당, 대청교회, 동광교회, 대한성공회 주교좌 성당 등은 의지할 데 없는 피란민의 영혼을 어루만져주었다. 보수동 헌책방 골목, 40계단, 계림 등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던 다방이나 주점들도 지친 피란 생활을 위로했다. 지금의 대청동 인쇄골목은 각종 정부 홍보물과 전시문학 작품들이 만들어지던 한국 문화 산실이었다.

대청로 인근 국제시장과 부평깡통시장은 전시의 유통 기능을 충실히 수행한 말그대로 중심상업지구였다. 지금은 문닫은 연안여객터미널은 당시 부산과 한국을 먹여살린 국가물류거점이었다. 1951년 4월 개장한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유엔묘지도 큰 자산이다. 터키인들은 그들이 죽은 곳을 성지로 여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에게 부산은 평화의 성지다.

이처럼 피란민 100만 여 명을 포용하고, 1023일 동안 꺼져가는 대한민국을 다시 살린 엄연한 국가수도가 어찌 임시적인가? 피란수도(避亂首都)가 적절한 표현이지 않을까? 지난해 남한산성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 관여한 한 전문가의 말씀이 의미심장하다. 세계적으로 수많은 별궁이 있으나 대부분 계절궁인데 비해, 남한산성처럼 평상시부터 준비되고 잘 보존된 피란산성의 사례가 특이하다는 점이 강하게 어필했다는 것이었다. 이는 부산 피란수도가 유네스코 유산으로서 가치가 충분함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의 최근 흐름이 고대·중세 건축물 중심에서 근대적 유산에 관심이 쏠리는 것도 좋은 여건이다. 나아가 '역사적 중요성이나 함축성이 현저한', '도시지역이나 도시건축물로서의 도시유산(urban heritage)'에 대한 가치평가가 이루어지는 것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특히 원형의 일부 변형에 관해서도 2011년 36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사회경제적 변화와 환경적인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는 건조환경'을 폭넓게 인정하고 있다. 피란기에 형성되었던 서민 주거지인 산복도로의 역사적 의미도 피란수도의 연장선에 있다. 부산은 헐벗은 피란민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피란민에게 한 방 비워주기 운동' 등 그 시절의 휴머니즘적 가치를 다시 살려보자는 산복도로 르네상스는 그런 역사적 맥락에서 값진 시대적 의미를 획득한다. 피란수도의 역사적 의미를 다채롭게 할 재료들은 무궁무진하다. 대청로 뒷골목은 개항기, 일제강점기 적산가옥과 그 이전의 동아시아 최대 무역교류 거점이었던 초량왜관 터가 착종된 '특정유형의 경관공간'이다.

지금부터 피란수도 자산을 유네스코에 등재하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시작해 보자. 준비에는 희망적 요소와 보완적 요소가 있다. 부산에는 당시 정부청사로 쓰인 건물의 역사, 건축적 의미를 소중히 여겨 거의 보존에 가까운 리모델링을 통해 대학박물관으로 쓰게 만든 건축 전공 교수의 혜안이 있다. 나아가 피란수도에 관한 분야별 연구 역량이 뛰어난 전문가와 재야의 고수가 많다. 최근 구성한 문화재청 세계유산분과의 전문위원도 부산에 있다.

그러나 시급히 보완해야 할 부분도 있다. 등재업무의 컨트롤타워 구성이다. 이를 위해 문화재, 건축, 근대건조물, 국제교류, 도시브랜드 등을 연계한 통합팀이 필요하다. 유네스코 유산 지정을 위해 지금부터 널브러진 피란수도의 연구, 기록, 건조물 및 인적 자원을 잘 꿰어 보석으로 만든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한 도시의 비극적 기억을 아픈 트라우마로 남길 것이냐, 아니면 세계인이 공감하는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승화시킬 것이냐는 그 도시의 수준과 역량에 달려있다. 인디언 격언이 딱이다. '천천히 빨리 가보자'.

부산발전연구원 부산학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