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의학자 가이듀섹(1923~2008)은 파푸아뉴기니 동부 고원지대 포어족 원주민에게 공포의 대상이던 '쿠루병(Kuru)'을 규명한 공로로 1976년 노벨생리학상을 수상했다. 쿠루병은 특히 얼굴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이면서 마치 웃는 듯한 표정으로 죽게 된다고 해서 '웃음병'이라고도 불렸다.
포어족은 식인풍습이 있다. 식인풍습은 전 세계 원주민 사회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지만 포어족은 가족이나 친척이 죽으면 그의 뇌를 먹었다. 가이듀섹은 쿠루병으로 죽은 원주민의 뇌 조직을 침팬지에 주입해 18~30개월 후에 같은 증세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쿠루병의 잠복기가 길었기 때문에 원주민들은 원인을 몰라 공포에 떨면서도 식인풍습을 이어갔던 것이다.
14세기 유럽을 휩쓴 흑사병으로 당시 유럽 인구의 1/3~1/4에 해당하는 7500만 명이 숨졌다. 이에 베네치아 등 항구 도시들이 내놓은 대책의 하나가 40일간의 검역 정선이다. 입항하는 배를 40일 동안 바다에 묶어놓고 선원이나 승객 중에 환자가 발생하는지 여부를 관찰한 것. 페스트의 잠복기가 일주일 내외인 점을 감안하면 꽤나 합리적이다. 그마저도 미덥지 못하면 카뮈의 소설 페스트의 알제리 오랑시처럼 특정 지역을 폐쇄할 수도 있다.
질병의 잠복기가 짧을수록 피해는 커질 수 있다. 만약 에이즈의 잠복기가 6주가량으로 짧았다면 미국은 벌써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반면 잠복기가 길어지면 보균자 본인은 그만큼 오래 살 수 있다. 지난해 12월 영국 옥스퍼드대 연구팀의 보고서에 의하면 아프리카 보츠와나에서는 최근 10년간 에이즈 잠복기가 10년에서 12.5년으로 길어졌다.
에이즈 원인 바이러스인 'HIV'가 인간 면역체계에 적응하면서 순화된 형태로 진화해 인체 치명성이 약화됐기 때문에 발병까지의 기간이 그만큼 길어졌다는 것. 'HIV'가 좀 더 인간에 고분고분해지면(?) 잠복기가 수십 년까지 길어질 수 있다고 한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의 잠복기는 '최장 14일'이라고 알려져 왔다. 그런데 14일을 넘겨 확진 판정을 받는 환자가 속출한다. 사우디 연구팀의 사례 발표에 의하면 최대 잠복기가 6주나 된다.
의학이 발전하는 만큼 바이러스도 진화한다. 최대 잠복기 14일을 놓고 메르스 바이러스가 인간을 비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