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년 기자 때부터 부산을 두고 들어온 두 평가가 있다. '문화 불모지' '겉으로만 제2 도시'가 그것이다. 지역에서는 이를 두고 "서울 쪽에서 빨대를 꽂아놓고 빨아대서 그렇다"며 울분을 터뜨렸다. 수도권은 "지역 사람들이 '중앙바라기'에 빠져 자력을 상실한 결과"라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동안 취재 현장에서 확인했다. '빨대'와 '중앙바라기' 현상이 살아 있다는 것을. 단지 현실에 맞춰 표현을 조금 수정할 필요는 있다. '빨대 아닌 지름 2.2m짜리 상수도관을 틀어 놓고' '먹고살기 위해 안 될 줄 알면서 중앙에 요구할 수밖에 없는' 정도로. 이 두 표현은 기억하기 편하게 축약도 가능하다. 보통명사로 바꾸면 '빈익빈 부익부', 더 줄이면 '격차'이다.
불민한 기자가 격차란 단어에 숨은 속뜻을 설명하다 보니 서설이 길어졌다. 예부터 인류는 크고 작은 격차와 함께 살아왔다. 격차는 '두 개 이상인 개체 간 떨어진 유·무형 거리'라고 풀이할 수 있겠다. 국가나 사회 구성원은 사안별로 그 거리가 0이어야 하는지, 조금인지, 멀찍해야 할지 고민하고 선택했다. 격차에는 국가나 사회 구성원의 가치관과 의지가 반영된다. 가령, 나에게 낯선 사람이 다가올 때 내가 불편을 느끼는 거리가 있다.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1914~2009)은 그 거리를 약 1.2m로 제시했다. 인간관계 친밀도를 나타내는 이러한 거리 두기는 동서양이나 문화권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반드시 지켜야 할 예절로 존중된다.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보편타당하고 합리성을 인정받은 거리가 잘 지켜질수록 그 국가·사회는 잘 굴러간다. 반대라면 그 결과는 말하나 마나다. 불편만 생긴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현실에서는 열거하기도 힘든 온갖 재앙과 비극이 발생한다. 극도로 가난한 서민이 국가복지로부터 너무 멀어지면 가족 동반 자살을 선택한다. 안전의식이 기준치보다 떨어진 자가 지은 건물은 허망하게 무너진다. 현대판 판도라 상자가 열린 것처럼 재앙이 쏟아지는 것이다.
지금 한국을 달구고 있는 민주당과 새정치연합 간 연대 문제를 격차란 단어를 통해 들여다보자.
우선, 새 정치 실현을 내세우며 일약 대권주자로 쾌속 성장한 안철수 의원을 지지했던 대중이 품은 기대치와 그동안 제도권 정치인이 돼 안 의원이 보여준 성과 간에는 상당한 격차가 보인다는 시각이 있다. 국회의원으로서 보인 밋밋한 의정활동은 물론 독자 노선을 버리고 민주당과 연합하는 모습은 앞선 '안철수 돌풍' 시점에서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클 수밖에 없는지 안 의원 지지 세력 중에는 요즘 배신을 거론하며 고개를 내젓는 이가 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일부 민심까지 이반시킨 이 '격차'는 합당할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첫째, 새 정치 실현을 갈망하는 안 의원 지지 대중이 내보인 욕구가 과연 현 한국 정치판에서 한 개인이 금방 이룰 수 있는 수준인가를 가늠해봐야 한다. 둘째, 대중이 가진 정치 개혁 욕구에 부응하는 역량을 안 의원이 갖고 있는가를 헤아려 보는 게 필요하다. 만일 대중이 이뤄낼 만한 요구를 했는데도 안 의원이 해결하지 못했다면 그는 이른바 '레몬(lemon) 정치인'이다. 중고차 시장에서 속으로는 결함이 많지만 겉으로는 멀쩡해 구매하는 고객이 일시 늘어나다가 결국엔 들통이 나 거래를 격감시키는 중고차를 '레몬'이라 하듯이 말이다.
반대로 안 의원 지지 대중이 요구하는 바가 한국 현실 정치판에서는 '단군 할아버지'가 나서도 성취 못하는 난제라면 안 의원은 아직은 될성부른 '피치(peach) 정치인'이라 볼 수 있다. 헛똑똑이 레몬 차량이 아니라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실속이 꽉 찬 '피치' 차량은 소비자에 도움을 주고 시장도 살린다. 안 의원이 이런저런 야유 속에서도 대권 행보를 이어가고 있으니 자신을 '피치'로 보고 있다는 점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일개 국회의원이 한국 정치를 개혁하기는 참 버겁지만 대통령 입장이라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고 안 의원은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실 현역 정치인이나 후보치고 자칭 '레몬'이라고 하는 이는 없고 모두 '피치'라 자부한다. 그러니 유권자가 사이비 '피치 정치인'을 솎아낼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국가 사회관계망 속에 합당한 격차가 자리 잡고 유·무형 자산이 고르게 분배되는 길로 간다. 그것을 실현해주는 6·4지방선거가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