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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안녕을 벗어나는 길 /이성희

안녕들하십니까 단 한 번의 질문으로 습관화한 무관심이 깨지기 시작했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3-12-25 19:08:30
  •  |   본지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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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나라의 앨리스'에는 이상한 길이 나온다. 앨리스가 그 길에 들어서자마자 붉은 여왕이 외친다. "더 빨리! 더 빨리!" "느림보 같으니! 자 여기에서는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으려면 계속 달릴 수밖에 없단다. 어딘가 다른 곳에 가고 싶다면 최소한 두 배는 더 빨리 뛰어야만 해!"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슈퍼맨이 되거나 아니면 심장이 타버려야 할 것이다.

'장자'에는 이 이야기의 속편이 될 만한 우화가 나온다. 자기 그림자와 발자국을 두려워하는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자기 그림자와 발자국으로부터 떨어지기 위해 달렸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림자는 떨어지지 않았고 발자국은 늘어만 갔다. 그는 자기가 느리다고 생각하며 자꾸만 빨리 달리다가 탈진하여 죽고 말았다.

달려야만 겨우 제자리를 유지하는 러닝머신과 같은 길은 낯설지 않다. 아니 너무 익숙하다. 지금, 바로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야말로 붉은 여왕의 길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새빠지게' 달려야만 제자리를 유지하는 그 길에서는 옆을 볼 겨를이 없다. 자기 그림자와 발자국하고만 관계한다. 그래서 남에게 무관심해진다. 무관심은 개인의 태도 문제이지만 또한 그 길이, 그 시스템이 요구하는 삶의 양식이기도 하다. 남에게 무관심한 채 새빠지게 팔다리를 저어 제자리를 유지하는 것을 여기서는 '안녕'이라고 부르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 안녕한 길에서 끝내 우리의 삶은 소진되고 우리의 생명은 탈진되고 말 것이다.

한 대학생이 쓴 대자보 '안녕들 하십니까'의 파장이 놀랍다. 침묵하는 세상을 향해 단지 한 번 질문을 던졌을 뿐인데 그야말로 일파만파다. '안녕들 하십니까'는 우리 시대 습관화된 무관심을 툭 건드린다. 붉은 여왕의 길에 있는 우리의 일상에서 그 '무관심한 안녕'이라는 삶의 양식과 습관은 무척 견고한 듯 보이지만 실상은 이렇게 허약한 것이다. 한 번의 질문으로도 모두가 화들짝 놀라며 우리의 안녕이 과연 안녕인가를 의심하게 되지 않은가.

사실 무관심이란 무기력의 다른 말일 뿐이다. 그 끝은 마비이고 마비는 다름 아닌 죽음의 기본형이다. 무관심 속의 안녕은, 애써 감추고 있지만 '안녕하지 못함'인 불안(不安)에 침윤되어 있다. 안녕한 것 같은데 항상 알 수 없는 불안에 휩싸여 있다. 대자보는 그것을 건드린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모든 불안은 분리의 경험에서 온다고 한다. 나와 타자, 나와 세계의 분리감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결코 무력감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남과 관계할 수 없는 무기력은 결코 안녕일 수 없다.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두 배로 더 빨리 달리면 된다는 붉은 여왕의 그럴싸한 유혹에 넘어가면 위험하다. 빨리 달리면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처럼.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한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 길에서 벗어나면 된다. 본래 길은 여러 갈래다. 장자는 말한다. 그림자와 발자국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쉽다. "그늘에서 쉬면 된다!" 너무 쉬운가. 혹시 이 말이 어처구니없이 들린다면 우리가 그만큼 그 길의 논리에 감염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끝없는 증식과 쉼 없이 달리기를 요구하는 신자유주의 시스템은 우리 모두의 고갈을 요구한다. 그것은 칼 폴라니가 말하는 '악마의 맷돌'처럼 모든 것을 가루로 만들지도 모른다.

내가 읽은 '안녕들 하십니까'의 파문들은 그 러닝머신에서 잠시라도 벗어나보자는 목마른 요청들이다. 끝없이 증식시켜야 하는 스펙의 짐을 잠시 벗었을 때 마음에 휴식이 오고 그때 다른 길과 다른 사람이 보인다. 여기에는 우리 사회 시스템 전체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과 반성이 담겨 있다. 눈에 보이는 정치 비판을 넘어서 더 근원적인 울림을 가진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를 억압하는 것에 대한 연약하지만 강력한 저항이다.

우리가 서로 관계하고 관심을 가질 때, 그리하여 서로에게 쉼의 그늘을 드리울 수 있을 때, 우리를 분리시켜 고갈시키려는 음모는 분쇄될 수 있다. 어제는 성탄절. 예수님 가라사대 "네 이웃을 사랑하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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