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두 번째로 맞을 새 천년은 음의 기운이 점차 융성하면서 유례없는 변화를 낳는 시기가 될 것으로 봅니다." 1999년 말, 새 밀레니엄을 앞두고 예상되는 변화들을 취재하던 중 한 명리학자로부터 들은 말이다. 천기누설급은 아니어서 귓등으로 흘려보냈다. 당시만 해도 Y2K(밀레니엄 버그: 컴퓨터가 2000년 이후 연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현상) 문제를 포함해 굵직굵직한 각 분야 화두나 현안들에 대해 세계의 관심이 쏠렸던 때였다.
알다시피 Y2K 문제는 2000년 1월 들어 기우로 일찍이 막을 내렸지만, 명리학자의 말은 해가 바뀔수록 가슴에 와 닿았다. '여풍당당'의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런 변화가 어찌 천기만으로 이뤄지겠는가. 못해도 8할 이상은 숱한 동서고금 남녀가 희생한 덕분이리라. 한 예로, "투표권 없는 자유는 가짜다"라고 외치며 일생을 미국 여성의 참정권 쟁취에 헌납했던 수전 브라우넬 앤서니(1820~1906)를 들 수 있다. 이 시각 온갖 권리 지위를 누리고 있는 그 나라 여성들은 앤서니에게 큰 빚을 진 셈이다. 바야흐로 양성 평등을 향한 세계인의 행진에 한국도 합류해 정말 다행스럽다. 인류사가 흐르면서 남·여 간, 남성과 여성 주위에 구축된 투명하지만 견고한 벽들이 조금씩 스러지는 현장을 우리 주위에서도 찾기란 그렇게 어렵잖다.
각급 학교 입학·졸업식이 잇달았던 지난 2월은 그런 현장이 풍성했다. 지난달 23일 대전 자운대 국군간호사관학교 교정에서 치른 입학식을 담은 보도사진을 보셨는지. 한 남학생 예비생도가 가족의 축하를 받으며 눈물을 감추지 않았다. 남성 '백의 천사'의 눈물이라! 신선한 감동에 마음속으로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같은 달 24일 육군사관학교의 68기 졸업식. 개교 66년 만에 여생도가 첫 수석 졸업한 소식이 단연 화제였다. 나흘 후인 28일 계룡대에서 열린 장교 합동임관식 때 대통령 표창을 받은 윤가희 소위가 주인공이다. '이브'의 입학을 금지했던 육사가 1998년 그 불문율을 포기한 후부터 여생도 수석졸업은 예견돼 왔던 바라 한다. 아직 한국 여장교들의 입지는 좁지만 이런 추세라면 사성 여장군이 첫 배출될 날도 머지않았다는 전망이 설득력을 갖는다.
남녀 간 격벽 허물기는 총·대선이 예고된 우리 정치판에서도 뚜렷하게 관찰된다. 지난 5일 새누리당의 27세 손수조 예비 국회의원 후보가 부산 사상에 공천돼 돌풍이 일었다. 대선의 경우, 박근혜 한명숙이라는 유력한 여야 여성 대선후보가 물밑 표심 잡기에 나섰다. 해서, 이번 총·대선은 남-여 혹은 여-여 후보 선택을 놓고 유권자가 고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렇게 된다면, 자의든 타의든 유권자 뇌리에 새겨진 남성·여성성 개념이 대선 후보를 선택하는 중요한 잣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논거로 첫째, 노련한 대선 기획자라면 성(性) 대결이라는 '단순-확실'한 이분 구도로써 표몰이에 나설 공산이 농후하다는 예측이다. 둘째, 유권자 역시 성별을 좇아 한 표를 행사하고픈 강한 유혹에 직면할 수 있다는 가설이다. 남성· 여성성의 정의 역할 가치에 대한 해석은 전문학자들에게 맡겨두자. 무릇 필부필부는 설익고 편향된 성 가치관, 즉 남성·여성성의 이데올로기에 자신이 길들여 있지 않은가를 따져 볼 일이다. 가령, 새누리당이 국회의원 예비후보의 공천 조건으로 내세운 '도덕성'은 여성(성)의 고유 덕목도 아니며 남성(성)에 결여된 덕목은 더더욱 아니다. 보다 큰일을 해야 할 이가 갖춰야 하고 바람직한 인간이 보유해야 할 보편타당한 가치관일 뿐이다. 쩨쩨하고 추잡하지만 힘은 있는 남성들, 팜므 파탈과 다름없는 권력지향성 여성들이 우리 주변에 넘쳐나니 굳이 그 이름들을 지칭할 필요도 없을 터이다.
새 천년은 지금까지 인류를 지배해온 남성·여성성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제3의 성이 새 인류종으로 탄생하기를 희망한다. 그런 맥락에서 이번 총·대선을 신인간 탐구의 장(場)으로 응시하면 어떨까. 후보자들을 남·여로 보지 말고 성별을 떠나 유익한 '인간'인지 따져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