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인문학 서적은 별반 대중적 인기를 누리지 못한다는 게 통설이다. 인문학 신간을 구입하는 주요 고객이 타 출판사 인문담당 편집자라는 자조 섞인 출판인들의 얘기는 그런 정황을 뒷받침한다. 동종 편집자들이 직업의식이 발동해 새 책을 구입한다는 건데, 일말의 씁쓸함이 책의 유통 경로에서 읽힌다. 마치 왕이 찾지 않는 왕비 신세와 흡사하다. 대중이 외면하니 외롭게 서점 진열대를 지키다가 일순간 자취를 감추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가 최근 국내에 펴낸 여러 저작이 그렇다.
지난해 5월 발간된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썰렁했던 인문학 출판시장을 일순간 달궜다. 예상 밖 인기에 힘입어 같은 저자의 다른 책이 뒤를 이었다. 지금까지 180만 여권이 팔렸다고 하니 국내 출판시장에선 시쳇말로 대박이다. 이 책들은 인문학 서적으론 드물게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집계에서 상위권을 차지해 여전히 그 자리를 고수 중이다. 여러 필자가 그 현상들을 언급해 지가를 드높였다. EBS는 샌델 교수의 강의를 집중 소개해 날개를 달아주었다. 기 죽은 인문학 출판시장에 모처럼 분 훈풍, 반갑다.
예서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우리는 왜 샌델 교수 같은 인기 작가, 저작을 내놓지 못하는가?"
우선,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한국 인문학 경쟁력이 외국에서 얼마나 경쟁력을 가졌는지 가늠해 보자. 지난 2월 내한한 두웨이밍(杜維明) 베이징대 고등인문연구원장은 걸출한 유교 연구학자다. 그런 그가 한국 사회는 유학자를 지폐 초상화로 모실 정도니 그 숭유 풍토가 부럽다고 했다. 그는 지갑에 1000원 5000원짜리 한국지폐를 넣고 다니며 강의 때 곧잘 수강생들에게 보여준다. 지폐 속 두 유학자, 잘 알려진 대로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다. 두웨이밍 원장은 중국 지폐에는 정치가인 마오쩌둥(毛澤東) 초상화뿐인데 한국인들은 유학자를 모셨으니 대단하다고 헌사를 아끼지 않았다. 과연 현실은 그의 말대로 일까. 아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두 유학자의 이름을 딴 각종 학술단체나 사업이 드물지 않게 보이긴 한다. 우리나라의 두 번째 이지스 구축함 이름도 '율곡이이함'이다. 뭔가 그럴듯해 보인다. 하나, 더 파헤쳐 보면 한계가 드러난다. 두 분의 명성은 겉치레에 그친다. 그 사상이나 역사적 가치 같은 알짜를 대중에 알리는 작업은 부진하다. 두 분은 단지 지폐 초상화로만 머물러 있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가령, 58세 퇴계가 26세 아래인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1527~1572)과 8년간 나이 학식을 떠나 정중하고 성심껏 벌인 사단칠정 논쟁은 국적 시대를 뛰어넘어 큰 감동을 준다. 요즘 뒤늦게 우리 사회가 토론문화에 주목하고 있지만 퇴계는 450여 년 전에 그 전범을 보여줬다. 한국 사회는 서양고전 중 하나인 정의론 등에 능숙한 샌델 교수에겐 혹하면서 정작 우리 것에는 시들하다는 자성론이 여기서 나온다.
대학자인 율곡·퇴계에 대한 이 같은 홀대는 고전을 포함한 우리 인문학 전체로 이어진다. 외국으로 눈을 돌려보면 사정은 더욱 심각하다. 고은 시인이 거듭 노벨문학상 후보로 이름만 올랐다가 번번이 쓴잔을 들이켠 이유도 우리 인문학이 외국에서 제대로 힘을 못 쓰기 때문이다. 인문학 중에서도 고전은 너무 기본체력이 부실하다. 외국 걸작 중 국내 중역본(重譯本)은 고사하고 번역조차 안 된 작품이 수두룩해 아예 읽을 수가 없다. 그러니 우리 고전을 번역해 외국으로 수출하고 명강의까지 하는 건 언감생심일 수밖에.
일국의 인문학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문화상품이다. 이웃 중국은 공자를 국격 상품으로 내세울 정도다. 특히 고전은 인류 사상·지혜를 망라한 압축파일이자, 다이아몬드 원석 같은 존재다. 그 비밀스러운 압축파일을 풀고, 황홀한 빛을 발하는 다이아몬드의 매력을 후세가 만끽도록 하는 게 고전 활성화 작업이다. 그러자면 학계의 노력만으론 부족하다. 국가나 지자체 기업이 인문학 진흥 매뉴얼과 지속적인 메세나를 제공해야 한다. 한국도 인문학 콘텐츠를 수출해 '문화 흑자국'으로 진입할 준비를 서두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