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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칼럼] 말과 글의 남북접근, 정부가 막으려는가 /권순익

올 예산 절반 삭감, 겨레말큰사전 편찬 사업무산 위기 처해

민족 동질화 외면한 정부 옹졸함에 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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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샌님'과 '혁명가'란 말은 도저히 함께 갈 수 없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데 이 말을 동시에 들은 사람이 있다. 3·1 운동후 중국으로 망명해 풍찬노숙(風餐露宿)의 독립운동 끝에 연안에서 결성된 독립동맹의 주석을 지내고 북한에서 김일성의 연안파 숙청 때 숙청당한 김두봉이 그러했다. 주시경의 제자였던 그는 화물선에 숨어 망명길에 오를 때도, 광복 후 조선의용군 4개 대대를 인솔해 연안에서 한반도까지 4700리를 행군해 온 후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될 때도 '조선말 사전' 원고뭉치를 끼고 있었다 한다. 부산 기장군 출신인 그의 외사촌 딸이 박차정 의사고 조카사위가 의열단의 영수 김원봉이다.

상해 망명 중에도 '깁더 조선말본'을 펴낼 정도로 조선말에 매달렸던 그를 두고 동지나 정적들이 붙인 별명이 골샌님이다. 그러나 그런 지독한 우리말 사랑이 오랜 분단에도 남과 북의 말과 글이 대체적인 동질성을 유지한 밑바탕이 됐다. 초기 북한정권의 2인자로 언어 정책을 총괄한 그가 남한에서 문교부 편수국장을 지내며 어문교육의 초석을 닦은 최현배와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주시경의 문하에서 김두봉은 수제자, 최현배는 애제자로 병칭됐는데 경남 울산 출신인 최현배는 5살 손위이고 고향이 인접한 김두봉과 유달리 친했다고 한다. 김두봉은 최현배가 참가했던 조선어학회의 맞춤법통일안을 수용했고 그 결과가 차이는 적고 닮음은 많은 오늘날의 남북한 어문이 된 것이다.

김두봉과 최현배만의 관계뿐 아니다. 일제에 맞서 우리말과 글을 지키려던 조선어학회 멤버들 모두가 그렇게 얽히고설켰다. 일제가 조작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중에서 사망한 이윤재와 한징도 그랬다. 이들이 우리말큰사전을 준비할 때 얼마나 치열하게 토론하고, 철저히 승복했던지 당시 서울 장안에선 "회의는 조선어학회처럼 하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고 한다. 해방 후 체제를 달리 선택했어도 같은 뿌리의 사람들이 한길을 닦았기 때문에 지금도 남한사람이 북한의 출판물을 읽고, 탈북자들이 남한의 책을 읽는 데 큰 불편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분야에서 급속하게 이질화가 진행돼온 남북한에서 말과 글만 예외일 수 없다. 분단 45년 만에 합쳐진 독일만 해도 통일 후 통일독일어 사전을 펴내니 표제어 11만5000개 중 5%가 훨씬 넘는 6000여 개의 새 단어가 등록됐다고 한다. 더 심각한 건 같은 단어의 뜻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서독 출신이 나(Ich) 너(Du) 같은 개인적 단어를, 동독 출신이 사람(man) 같은 집단적 단어를 더 선호하는 등 달라진 언어습관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동·서독이 함께 '괴테사전'을 만드는 등 언어적 접근작업은 계속됐는데도 그렇다.

우리도 남북한의 언어를 통합하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니다. 국립국어연구원의 주도로 1991년도부터 중국의 장춘 베이징 등지에서 남북학자들의 만남이 이어지고 있고 국어 순화, 방언 문제 등에는 성과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연구 수행에 필요한 경비문제 등을 감안하면 결국은 우리 정부의 노력과 지원이 가장 중요할 수밖에 없다.

지난 4일 고은 시인이 호소문을 발표했다. 자신이 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이 무산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지난 2004년에 남북사회문화사업으로 시작, 어휘 30만 개 수록을 목표로 남과 북의 언어학자들이 참가해 진행되는 이 사업에 대해 정부는 올해 예산 30억 원의 거의 절반을 삭감했다. 천안함 사건 등에 따른 남북경색의 여파라고 한다. 급여를 받지 못하는 연구용역자들이 떠나고 북에 연구지원비가 전달되지 않으면 사업 자체가 답보하거나 후퇴할 게 뻔하다.

천안함 사건 등을 놓고 북한정권에 분노하는 이는 많다. 그러나 분노하는 이들 중에서도 사전 편찬 지원을 줄이는 데 공감할 이가 몇이나 있겠는가. 나라 규모에 비하면 몇 푼에 불과한 돈을 지렛대 삼아 민족의 동질화작업을 외면하는 정부의 협량(狹量)엔 아연할 뿐이다. 남의 민족의 핍박 속에서 앞서 간 이들이 목숨을 내놓고 지킨 말과 글이다. 마침 그제는 한글날이었다. 남과 북의 그 많은 기념일 중에서도 유일하게 같은 명칭을 쓰는 날이 '한글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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