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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미세한 변화-일하기와 일내기의 분기점 /이지양

날림으로 시작된 도로명 주소 체계

근거없는 작명으로 누구도 기억 못할 길 이름만 넘쳐나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09-29 21:52:40
  •  |   본지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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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재미난 사랑방 이야기가 드물다. 어렸을 때 어깨너머 들었던 사랑방 이야기에는 오래오래 인생의 지침이 될 만한 '생활 철학'이 꽤 쏠쏠하게 들어 있었다.

그 가운데는 지금 세계적 명성을 떨치는 그룹의 창업자 이야기도 있었다. 그 집안은 원래 300석쯤 거두는 중소지주, 그러니까 시골부자였다고 한다. 그 집도 다른 집처럼 맏아들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이고, 둘째 아들은 형을 따라서 크라고 좀 내버려두었다고 한다. 자연히 둘째 아들은 밖으로 돌았고 '개화' '신문명'에 일찍 눈을 떴기에 어느 날 '단발'을 하고 돌아왔다. 부친은 "저 놈이 집안 망칠 놈"이라며 가차 없이 '부자 의절'을 하고 아들을 쫓아내버렸다.

그 소문이 퍼져 친구들이 찾아와 그래도 의절은 너무 심하니까 취소하라고 권했다. 부친이 이렇게 대답했다. "저 놈이 지금은 머리 모양만 바꾸었지만, 저 머리로 갓 쓸 수 없으니 모자 써야지, 양모에 한복 입을 수 없으니 양복 맞춰야 하고, 개화신사 차림을 하고 주막에 갈 수 없으니 요릿집에 가야 하고 기생들 밥도 사줘야 할 텐데, 우리집 살림은 몇 해 못 가 거덜 날 것이네. 집안을 거덜 내느니 아들 하나 없는 게 낫지!" 그 쫓겨난 둘째 아들이 대구에서 내복 장사, 와이셔츠 장사를 시작으로 '돈(錢) 병철'이라 불리는 사람이 되었으니, '그 아버지에 그 아들'로 사물의 전체 구조를 통찰하는 눈은 같았던 셈이다. 사랑방 이야기 중에서는 참으로 기억에 남는 이야기이다. '기미' '낌새'를 알아차리는 지혜로 '수구 대 개화'가 장군 멍군으로 팽팽한 한 수를 두었을 뿐 아니라, 윈-윈으로 해피엔딩 된 사례여서 듣는 재미도 특별했다.

2012년 1월 1일부터 전면 시행한다는 '새 도로명 주소체계'라는 것을 보면서 '수구 부친'의 심정을 거듭 생각해보게 된다. 이렇게 일하는 공무원이야말로 쫓아내야 할 날림 개화 일꾼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1996년 김영삼 정부에서 시작된 이 일은 착안 의도는 매우 좋았다. 1910년대 일제가 만든 지번 방식 주소체계의 미비점을 보완하고 세계적 추세에 맞게 도로명 방식으로 바꾼다는 것이 핵심 의도였다. 지번 방식을 써오던 일본마저 1962년 '주거표시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주소제도를 개편했고, OECD 국가들은 물론 중국과 북한도 도로명 방식에 의한 주소제도를 사용하고 있으니까.

의도가 좋았다고 시행 과정이나 결과도 좋은 것은 아닌 법. 시행과정에서 혼란이 시작됐다. 유구한 세월에 걸쳐 사용해온 지명을 근거 없이 작명하여 바꾸었기 때문이다. 거의 '신천지 개국(開國)' 수준으로 지명을 바꾸는 것에서 문제가 집중되기 시작한 것이다.

오르다길, 내리다길, 해오름길 같은 이름이 부지기수로 있어 아무도 알지 못하고, 기억할 수도 없다. 우습다가, 골치가 아프다가, 마침내 울화통이 터져서 일한 사람을 쫓아내버리고 싶을 지경이다. 여기도 중앙로 저기도 중앙로, 중앙로는 무려 293개, 꽃나래 신나래 같은 식의 나래길은 서울시에만 87개라고 한다. 필자는 평소 중국 여행은 갈 필요가 없다는 농담을 하곤 했다. 우리나라 지명 가운데 중국에 없는 지명이 어디 있는가? 대륙을 사모한 조상들이 그렇게 그 당시의 선진화를 이루어 놓은 결과인 것이다. 그렇게 600년을 지냈다. 이제 우리는 어느 나라를 사모하여 모방하고 싶은 것인가?

땅이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라면 지명은 당연히 주민들의 생활 정감에서 우러나온다. 지명이라면 첫째 생활의 정감이 절실히 스며 있고, 둘째 역사적 근거가 있고, 셋째 전체를 연결 지어 인지하기 편리해야 하며 넷째 주민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지금 이렇게 장난하듯 새 이름을 붙여 지명을 바꿔 놓으면 학문적으로는 고지도며 옛 문헌을 보는 데 혼란스럽고, 생활 현실에서는 유통 업무, 지명 표지판, 가게 간판, 기업 봉투, 내비게이션, 지도를 비롯해 모든 것이 다 바뀌어야 한다. 최종적으로 사람의 기억 구조가 바뀌는 데는 다시 600년이 필요할 것이다. '도로명 주소체계 정비'면 '정비'에 그쳐야지, 왜 개국 수준으로 바꾸는가. 이것은 일을 하는 것인가, 일을 내는 것인가. 공무원 철밥통은 뭘 하든 밥이 나오니 좋기도 하다! 영어에 올인한 한글세대는 이런 도로명이 반가운가? 알고 싶다.

연세대 국학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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