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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화폐의 인물들 /이재호

조선시대 인물 일색… 시대 변화와 안 맞아

새 화폐 발행 땐 임정 이후 인물을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04-07 21:29:19
  •  |   본지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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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의 인물들은 그 국가와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와 시대정신을 표상한다.

미국 달러화의 화폐인물은 국부 워싱턴과 제퍼슨 등 건국의 지도자들이다. 중국 위안화는 중국인민공화국의 창건자 마오쩌둥이다. 일본은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와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 등이다. 지금은 유로화로 바뀌었지만 과거 독일 마르크화의 화폐인물은 현대 양자론의 선구자인 물리학자 막스 프랑크였다.

각국의 화폐인물들은 공통점이 있다. 그 민족의 역사적 위인이라고 화폐인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화폐를 발행하는 당해 국가의 인물이어야 하는 것이다. 중국의 경우 한무제나 당태종이 명군이라 하더라도 봉건군주이므로 중화인민공화국의 화폐인물이 될 수 없다. 프랑스의 역사적 영웅 샤를마뉴 대제나 나폴레옹이 프랑스공화국의 화폐인물이 될 수 없는 것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공화국의 이념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화폐인물은 그 국가의 이념을 표상하고 국가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인물인 경우가 많다. 일본의 경우 20세기 이후 국가목표가 '아시아를 넘어 유럽을 지향한다'는 탈아입구(脫亞入歐)였기 때문에 이러한 이념을 제시한 사상가 후쿠자와가 1만 엔권의 인물로 선택됐다. 또한 서구적 성향의 소설가 나쓰메가 현대 일본이 지향하는 시대정신에 맞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화폐에 표상되는 인물의 초상이 그 인물의 진영(眞影)이어야 하는 것이다. 후세 화가들이 상상으로 그린 초상화가 화폐인물이 된다는 것은 그 인물의 진면목을 그르칠 수도 있고 종교 예술과 달리 실용성과 계산성을 특성으로 하는 화폐의 본질과 맞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대한민국이 수립된 지 60년이 지났는데 우리 화폐의 인물들이 모두 조선시대 인물이라는 것은 문제가 있다. 세종대왕은 민족사에서 가장 위대한 성군이지만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의 화폐인물로서 적합하지 않다. 퇴계와 율곡은 조선의 국교인 성리학의 태두들로서 자유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화폐인물에 적합한 분들은 아니다.

매일 접하는 화폐의 인물들은 인간의 정신에 무의식적인 영향을 미친다. 화폐를 보면 우리는 아직 조선시대에 살고 있다. 한국사회에 아직도 대통령을 임금님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고 민주주의 의식이 정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화폐의 영향 때문이 아닐까.

당장은 아닐지라도 장래 새로 발행하는 화폐의 인물은 대한민국의 법통인 상하이임시정부 이후의 인물이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또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가치와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인물이어야 할 것이고, 그의 삶이 후세의 젊은이들에게 자신을 분발하게 하고 귀감이 되는 인물이면 더욱 좋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도산 안창호는 대한민국의 화폐인물로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30년 전 공개돼 당시 모 월간지에 게재된 일제 고등경찰의 기밀문서에 "조선의 2대 인물은 안창호와 이상재이다. 종교의 그늘에 숨어서 독립운동을 하는 점에서 안창호는 이상재보다 작은 인물이다. 그러나 안창호의 휘하에는 지역, 계층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불량한 조선인들이 모여들어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고 하는 점에서 안창호는 이상재보다 위대한 인물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안창호의 일생은 성실과 신의, 무실역행(務實力行)으로 일관된 것이었다. 한 어린소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상하이 시내에 나갔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된 그의 삶은 후인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위인들뿐 아니라 묵묵히 의무를 다하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무명의 애국자들도 우리 사회가 발굴하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일본에서는 '사카모토 료마'라는 무명의 지사를 발굴하여 일본사 천 년의 인물로 만들었다. 무명 영웅들의 삶이 후대의 귀감이 된다면 언젠가 화폐의 인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 60년이 지났지만 화폐의 인물로 전 국민적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인물은 드문 것 같다. 인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한국사회의 극심한 이념대립에도 원인이 있다. 마음을 열고 국가를 위한 그 인물의 진정성을 보아야 할 것이다.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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