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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지극하다는 것, 기다린다는 것 /김수우

조급해하지 말고 매사에 최선을…다소 불편해도 지극해지기를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09-11-13 21:06:00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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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참 '함부로'이다. 함부로 문을 열고 함부로 문을 닫는다. 함부로 사랑하고 함부로 이별한다. 함부로 소비하고, 함부로 폐기하고, 함부로 편리하고 그리고 함부로 포기한다. 한 마디로 지극함을 잃어버린 시대이다. 예전 우리 삶에는 지극함이 있었다. 용왕님께도 빌고 산신에게도 빌었다. 정화수를 떠놓고 달님에게도 빌고 나무에게도 빌었다. 천지신명을 믿고, 매사 지극함을 믿어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기다릴 수 있었다. 지성도 버리고 감천도 버린 시대인가. 하나같이 조급하다. 그렇다면 우린 어디서 감동할 것인가.

지극(至極)은 더할 수 없이 극진함을 말한다. 극진(極盡)이란 정성이 더할 나위 없음이다. 극(極)에는 사물의 최상 최종의 곳, 지극히 미묘한 곳, 진선 등의 뜻이 담겨 있다. 그 풀이에서 보듯 중요한 건 극이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곧 어디에 지극할 것인가가 문제다. 돈에 지극할 것인가. 명예인가. 경쟁인가. 진정 어떤 욕망에 지극할 것인가. 허나 지극이란 바로 사람에게 지극함을 이른다. 곧 타자에 대한 궁극함이다. '혼자만'의 사랑, '혼자만'의 행복은 결코 지극한 움직임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지극함은 공경을 전제로 한다. 함부로 남을 외면하거나 무시하는 사람은 지극함을 가질 수 없다. 다른 사람을 충분히 돌아볼 때, 마음을 다할 때 기다림의 지혜가 작동한다. 결국 지극함이란 씨앗을 적시는 미세한 습기 같은 게 아닐까.

우리 동네 골목 어귀에는 푸성귀를 파는 할머니 몇몇이 종일 나란히 앉아 있다. 서로 같은 걸 파는 것 같아도 자세히 보면 그날그날 각 할머니들이 가진 푸성귀들이 조금씩 다르다. 오늘 한 집에 배추가 좋으면 옆집에는 고구마가 좋다. 한 집에 미역이 있으면 바로 옆집에는 파를 잘 다듬어놓았고, 그 옆집은 모과를 갖다 놓았다. 얼핏 같은 좌판처럼 보이지만 나름대로 충분히 배려하는 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곳을 지나면 삯바느질집, 세탁소, 이발소, 치킨집이 나란하다. 일년 내 별 변함없는 그 풍경을 보면서 그 잔잔한 일상이 참 지극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하루하루가 365일 같은, 평생이 하루 같은 그들의 성실함이 어찌 지극이 아닐 것인가.

'神奇卓異非至人 至人只是常'(신기탁이비지인 지인지시상). 지인(至人)이란 신기하거나 특이한 것이 아니라, 다만 평범할 뿐이라는 채근담의 말이다. '지인'은 지극함에 이른 사람을 말하는데 이는 모든 존재와 하나됨을 의미한다. '나는 이렇고 이렇다'는 장벽이 제거되어야 하나가 될 수 있다. 참된 도를 가진 사람은 오히려 평범하다. 항상성을 이해할 때 평범할 수 있으며, 햇살이나 바람이 그렇듯 생명을 키워낼 수 있다. 이처럼 지극함은 모든 불균형을 조화롭게 만드는 기운이다. 그건 마치 모래사장에 놓인 작은 소라고둥처럼 평범하고 아름답다. 또한 지극함은 무한히 펼쳐진 밤하늘과 같다. 모든 별들이 제자리에서 빛나며 시공을 가로지르는 광범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보도블록 틈 납작한 풀잎에서 지극함을 본다. 상처에서 돋는 새살에서, 따뜻한 붕어빵에서, 부러진 의자다리를 처매 놓은 노끈에서도 지극함을 본다. 잘 마른 북어의 눈빛에서도, 걸음마를 막 떼는 아기 발목에서도 지극한 몸짓을 본다. 매사 최선을 다하는 몸짓, 최선으로 흔들리는 모든 움직임이 지극하지 않겠는가. 운명(運命)을 말할 때 운(運)은 옮기다, 움직이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변화하는 것이 운명이라는 말이다. 결국 운명은 남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지극한 노력을 이름에 다름아니리라.

지극함은 조금 불편하다.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지극함은 기도의 자세를 닮지 않을 수 없다. 숨어서 빛나는 외로움처럼 모든 지극함은 따뜻한 체온을 가지고 있으며, 섬세한 파문을 가지고 있다. 어떤 물신화된 구조 속에서도 이 지극함을 회복한다면 인간은 어떤 겨울도 춥지 않을 것이며, 어떤 어둠도 캄캄하지 않을 것이다. 이 지극함에서는 모든 고통이 작은 그늘 같은 기다림의 여백이 된다. 마음이 충분히 낮아진 까닭이다. 11월은 무릎을 낮추고 지극함을 배우는 계절이 아닐까. 쏟아지는 단풍 속에서 '함부로'가 아닌 '지극한 고요'를 본다.

시인·백년어서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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