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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나의 친애하는 적 /정지창

연암·다산 출신지, 후대에선 안따져…정치적 견해 달라도 나와 같은 존재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09-10-19 20:49:11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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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베르너 헤어초크 감독의 '나의 친애하는 적'을 보았다. 1960~ 70년대의 이른바 '새로운 독일 영화'를 대표하는 헤어초크 감독이 독일 배우 클라우스 킨스키와의 애증이 뒤섞인 우정을 회상하며 만든 다큐멘터리인데, 단순히 감독과 배우 사이의 연예가 뒷얘기에 그치지 않고 인간관계의 미묘한 이치를 깨우쳐주는 영화였다.

원수 같은 친구가 어디 두 사람뿐이겠는가. 우리에게도 친숙한, '천생연분/평생원수' 퀴즈의 주인공인 할아버지 할머니는 우리 농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밤낮 싸우던 영감님이 돌아가시자, 끈 떨어진 연처럼 먼 산만 바라보며 찔끔찔끔 눈물을 짜는 할머니의 모습도 우리에게는 낯선 풍경이 아니다. '워낭소리'의 노부부는 얼마나 정겨운 우리 부모님의 모습인가.

DJ가 서거하기 직전에 YS가 문병을 가서 화해하는 장면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아무렴, 그래야지' 하고 고개를 끄덕인 것은, 그것이 인간 보편적인 '천생연분/평생원수'의 정서에 일치했기 때문이다. '민주화의 평생 동지이자 지긋지긋한 라이벌'인 두 사람의 애증으로 얼룩진 파란만장한 현대사를 함께 살아온 동시대인들은, 두 사람의 화해를 불편한 시대와의 화해로 받아들이며 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으리라.

한문학을 전공하는 동료 교수가 이번에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완역하여 출간하였다. 출간을 축하하는 조촐한 술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번역과정의 어려웠던 속사정이 화제에 올랐다. 부인과 가족, 현장 답사의 안내인, 출판사 편집자 등 여러 공로자들이 거론되었는데, 나는 그가 중국의 한 대학에서 혼자 번역작업에 매달리고 있을 때, 옆방에 있던 '원수 같은 아무개 교수'도 숨은 공로자의 하나이니, 그에게도 책을 한 질 보내라고 권했다.

두 사람은 같은 한국인인데도 정치적 입장이 너무 달라 선거를 전후한 몇 달 동안 만날 때마다 언쟁을 벌이다 급기야는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절교를 선언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그런 '원수'가 바로 옆방에 있었기에 술도 덜 마시고 홧김에 더욱 열심히 번역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원래 성격이 호탕한 그 한문학 교수는 빙긋이 웃으면서, 그렇지 않아도 벌써 책을 보냈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사실 정치적 견해나 당파, 출신지역이란 얼마나 사소하고 허망한 문제인가. 연암이 노론 집안이고 다산이 남인 출신이라는 사실을 후대의 우리는 따지지 않는다. 그분들이 어느 지역 출신인지 우리는 관심이 없다. 그런데도 당파에 따라 상대방을 모함하고 벼슬을 빼앗아 귀양을 보내고 사약을 내린 것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원수로 알고 생존권을 빼앗아 영원히 제거하려는 증오와 복수의 악순환에 갇혀 있었던 탓이다. 나와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시대를 사는 동시대인이고, 나처럼 존중받을 권리와 함께 나처럼 인간적 한계를 지닌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보통사람이 실천하기 힘든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이웃사랑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면서 부딪히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철천지원수로 미워하지만 말고, '친애하는 적'으로 포용하라는 뜻이리라. 다시 말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원수도 친구로 여기라'는 말과 마찬가지라고 나는 믿는다.

부마항쟁 30주년을 기념하여 부산에서 열리는 '민족극한마당'에 당초 약속했던 정부의 지원금이 끊겼다는 소식을 듣고 한동안 가슴이 답답했는데, 뒤늦게 지원금이 내려왔다는 문자 메시지가 날아왔다. 지원금을 주는 조건으로 반정부 집회나 시위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요구한 것부터 상식에 어긋난 일이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각서와는 관계없이 지원금을 주기로 했다니 다행한 일이다.

봉하마을 들머리의 만장 제작에 참여한 것이 정치적 편향을 드러낸 행위인지도 의심스럽지만, 그것을 빌미로 부산 연극인들의 유서 깊은 전국 행사에 지원을 끊니 마니 하는 것은 너무 쩨쩨한 짓이 아닌가. 통 크고 시원시원한 부산 사람의 기질에도 맞지 않고, '친애하는 적'을 포용하는 부산의 개방적 이미지에도 어울리지 않는, '쪼잔한' 문예지원정책은 영원히 거두어주길 바란다.

영남대 독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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