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두 번쯤 자신을 배신하거나 실망시킨 연인을 용서하는 건 너그러움일 수도 있고 순정이랄 수도 있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배신하는 연인에 연연하면 사람들은 그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그게 정상이고 세상이치이다. 부산사람들과 부산정치인들의 관계가 이렇다.
그제 서울에서 열린 '수도권 규제 철폐 반대 국민대회'에 한나라당 부산출신 국회의원들은 한 명도 참가하지 않았다. 이 대정부 규탄대회엔 부산지역 100여 개 시민사회단체들이 부산시민사회연대란 이름으로 참석했다. 부산의 유권자와 선량이 얼마나 괴리돼 있는지를 이보다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을까 싶다. 이달말께 예정된 정부의 지방발전 종합대책 발표를 지켜보겠다는 게 의원들의 변명이지만 그때는 한 번 더 실망스런 모습을 보게 될 것 같다.
지난 10일의 한나라당 부산시당과 부산시 협의회에서는 더 심한 장면이 있었다. 부산 금융중심지 지정 등 수도권 규제 철폐에 따른 대응방안을 건의한 부산시에 의원들의 공박이 쏟아진 것이다. "부산시의 방안이 미흡하고 근거논리가 빈약하다"는 의원들의 불만까지는 이해한다고 치자. 그러나 "그동안 수도권을 규제했지만 지역이 활성화됐느냐"며 "개인적으로 수도권 규제완화에 찬성한다"는 한 의원의 발언은 귀를 의심할 지경이다. 그는 지역에서 4선의 선수를 쌓았고 한나라당 유력계파의 명실상부한 좌장이다. 지역구가 서울이나 경기도도 아니고, 전국구 의원도 아니라는 말이다.
의원들이 요구한 근거로 따지면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든 부산의 현실만큼 생생한 근거가 없다. 또 억지와 비합리로 말하자면 한두 달새 180도 기조를 바꿔버린 이 정부의 지방정책만 한 것도 없다. 공청회는커녕 내부토론이나 의견수렴 한 번 없이 군사작전하듯 정책을 바꿨다. 지난 대선 때부터 '선(先) 지방발전 후(後) 수도권 규제완화'를 공언해온 이명박 대통령과 이 정부다. 자신들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거나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대통령과 정부는 정책변환의 이유를 반드시 설명해야 한다. 국가의 틀이 이렇게 쉽게 바뀌는데, 또 그것이 지역에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데도 부산출신 의원들은 지금 침묵하고 있다.
수도권출신 의원이나 오세훈 서울시장 등이 일본이나 프랑스 영국에서는 대수도권으로 유턴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의 의도적 왜곡이나 외면일 뿐이다. 그 나라들은 이미 30~50년간의 분권과 분산정책으로 전국적인 균형성장이 가능해진 상태이다. 사람과 돈의 집중으로 이미 동맥경화증에 걸린 수도권에, 제조업까지 싹쓸이할 길을 열어 주겠다고 한 우리나라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부산출신 의원들이 부산의 위상을 짚고 싶다면 수도권 거점 도시인 인천시와 부산을 비교해보기만 하면 된다. 예산만 해도 인천시의 내년도 예산이 6조5000억 원으로 부산과 6000억 원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매년 20% 안팎으로 예산이 증가하는 인천의 추세라면 몇년내 부산과 예산규모 역전은 불보듯 뻔하다. 예산과 인구, 산업 모든 면에서 부산이 뒷덜미를 잡히고 있는 것이다. 인천을 견제하자는 게 아니라 수도권의 집중화에 반비례해 지방이 공동화돼 온 게 그동안의 현실이었다.
부산의 미래를 바꿀 고비고비에 의원들이 시민을 실망시킨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노무현정부 때 공공기관 이전 결정과정에서 부산 이전기관이 한전에서 토공으로, 다시 해양수산기관으로 바뀌는 동안에도 그랬고 대선 직후 해양수산부가 폐지될 때도 마찬가지였다. 야당의원이어서, 정권탈환이 급선무여서 그랬다면 지금은 어떤가. 지금 부산출신 의원 중에는 국회의장도 있고 여당의 사무총장도, 최고위원도, 국회 상임위원장도 있다. 이제 여당이라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자제해야 한다면 "정부의 수도권 규제가 공산당식"이라는 극언까지 하던 김문수 경기도 지사는 어느 당 소속이었나.
부산경실련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신라대 김대래 교수는 한 토론회에서 부산을 '담합도시'라고 규정한 적이 있다. 부산을 이끌어가야 할 지도층이 시민들과 유리된 채 자신들만의 이해관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뽑은 것은 시민들이다. 그 응보가 오늘의 이 위기에서 시민의 이익을 대변하기보다는 시민들을 꾸짖는 선량들로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