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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여행의 지혜 /방현석

동남아 여행지 장사꾼들·옵션 피할 수 없다면 지혜로 넘기자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08-05-23 21:08:26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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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를 여행하려는 사람들의 문의 전화와 이메일이 늘어나는 걸 보니 벌써 휴가철이 다가오는 모양이다. 최근에 내가 받은 여러 가지 질문 중에 하나는 도대체 동남아시아의 여행지 중에서 구걸하는 아이와 장사꾼들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곳이 어디냐는 것이었다. 여행자들이 가장 피곤하게 여기는 것 중의 하나가 구걸하는 아이들과 장사꾼들임은 분명하다. 특히 동남아를 여행하려면 수시로 이들과 실랑이를 벌여야 한다.

대부분의 가이드들은 돈을 주거나 물건을 사주면 버릇이 나빠진다며 충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건을 사주거나 적선을 하는 여행객들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쪽도 최선으로 여기지 않는다. 물건을 사주지 않으려면 아예 그들을 외면하거나 심하면 몸싸움까지 벌여야 할 경우가 생긴다. 그러면 마음이 상한다. 내가 너무 매정하게 군 것 같은 생각 때문이건 상대가 짜증스러워서건 마음을 다친다. 필요도 없는 물건을 사서 버리거나 동전을 나누어주는 동정행위도 그리 내키지는 않는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동전 몇 개를 뿌리는 값싼 동정으로 이 상황을 즐긴다면 그건 야비한 일이다.

마음 상하지 않되 야비하지도 않게 즐기는 방법을 찾기가 쉽지는 않다. 그러나 많이 겪다 보면 방법이 생긴다. 그 최상의 방법 중에 하나가 선제공격이다. 사라고 권하는 장사꾼에게 돈이 없다는 몸짓을 하며 그냥 달라고 손을 내미는 방법이다. 그 나라 말을 몰라도 그 정도는 '보디랭귀지'로 어디에서나 통한다. 물론 해당하는 짧은 현지어를 알아두면 더욱 좋다. 베트남이라면, '또이 콩 꼬 띠엔. 미엔피?(나 돈 없다. 공짜 어때?)' 그러면 잠시 어리둥절해 하다가 얼른 꽁무니를 내뺀다. 쫓아가며 손을 한 번 더 내밀면 완승이다.

또 하나 동남아시아 여행자들이 끔찍스러워하는 것이 쇼핑이다. 패키지 관광을 간 사람들은 한결같이 쇼핑코스에 치를 떤다. 여행사와 가이드를 욕하며 쇼핑 없는 여행을 할 수 있는 여행사를 소개시켜 달라고 한다. 내 대답은 간단하다. 그런 여행사는 없다. 그리고 도리어 면박을 준다. "겨우 정상 항공권요금 수준의 여행경비를 부담하고 3박4일의 여행을 즐기면서 쇼핑도 안하겠다고 하면 그건 양심불량이야."

패키지 관광을 하면 반드시 따라붙는 옵션과 쇼핑을 피할 수 없다. 여행사들이 내놓는 많은 저가 상품들을 볼 때마다 나는 경탄을 금치 못한다. 나올 수 없는 가격들이 신문의 광고면을 도배한다. 도저히 불가능한 가격의 비밀이 바로 옵션과 쇼핑에 있다. 그런 저가 상품을 선택해놓고 옵션과 쇼핑을 짜증스럽게 생각하면 여행은 엉망이 되는 게 당연하다.

여행사도 먹고 살고, 가이드도 먹고 살아야 하고, 나도 어차피 시장 구경을 하긴 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진다면 정신건강에 훨씬 좋다. 그렇다고 뒤집어씌우는 대로 뒤집어쓸 수는 없다. 지혜가 필요하다. 쇼핑센터에서는 유쾌하게 구경하고 좀 비싼 줄 알면서도 반값 정도 깎아서 하나 정도 사주는 것은 패키지관광에서 필수인 지혜이자 예의이다.

옵션관광의 일정을 미리 잘 파악해서 적당히 응하면서 패키지와 옵션 어디에도 들어있지 않는 혼자만의 여행시간을 만들어내는 것도 꼭 필요한 지혜다. 가령 마닐라에 간다면 호세 리잘의 기념관에 가보는 일이다. 필리핀 독립의 아버지로 사랑받는 호세 리잘은 스페인 식민지에 대항하다 35세에 총살당한 인물이다.

마닐라의 로하스 거리에 있는 성벽도시 인트라무로스에 들어서면 바닥에 길게 찍혀있는 사람의 발자국을 만날 수 있다. 그 주인이 바로 호세 리잘이다. 부유하고 지적인 집안에서 태어나 의대에서 공부하고 20대 초반에 의사가 되었던 그는 '나를 건드리지 마라'라는 소설을 통해 스페인이 필리핀을 건드리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인트라무로스의 감옥에서 시작된 그의 발자국은 사형장에서 끝이 난다.

사형이 집행되기 두 시간 전에 '사랑하는 불행한 연인'과 결혼한 그는 사형집행관에게 돌아선 채 총살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가슴에 총탄을 맞고 앞으로 쓰러지면서 식민지 지배자들에게 무릎을 꿇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늘을 바라보며 그가 쓰러진 자리에 세워진 기념탑에는 감동적인 그의 시 '나의 마지막 작별'이 새겨져 있다. 아무리 가난한 나라일지라도 우리를 숙연하게 만드는 감동적인 인물과 장소 하나는 있기 마련이다.

소설가·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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