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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필리핀 `영어 올인` 100년의 손익 /방현석

대강의 영어를 구사하는 대신 심도있는 학습의 능력을 잃었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08-04-18 19:56:55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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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교육을 담당할 미국인 교사 제1진 1074명이 필리핀에 도착한 것은 1901년이었다. 미국의 47개주 192개 대학에서 교육 받은 이 교사들은 필리핀의 29개 학교에서 4000명의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0년 뒤인 1911년에는 미국인 교사들로부터 교육 받는 필리핀 학생 수가 100배 가까이 늘어나 35만5722명이 되었다. 1920년에는 100만 명을 넘어섰다.

영어를 잘 하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칭찬을 받고 작문대회와 웅변대회에서 상장을 받았다.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미국 유학의 기회도 얻었다. 반면 학교에서 사용이 금지된 필리핀어를 쓰는 아이들은 매를 맞고 감점을 당했다. 20년 만에 성조기가 펄럭이는 4404개의 학교에서 모든 아이들이 영어만을 사용하게 되었다. 필리핀에서 미국의 영어교육은 성공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학교 밖의 사정은 달랐다. 집으로 돌아가면 아이들은 모두 필리핀어를 사용했다. 모든 가족이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집안조차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필요한 내용을 영어로 전달할 수는 있었지만 마음까지 온전하게 전달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호세 라카바라는 필리핀을 대표하는 최고 시인의 한 사람이고 그의 영시는 필리핀 교과서에 실려 있다. 그 역시 모든 학교교육을 영어로 받았다. 그런 그가 영어로 쓰던 시 쓰기를 그만두고 필리핀어로만 시를 쓰겠다고 선언했다. 영시를 쓸 때는 마치 혼잣말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필리핀어로 쓸 때는 그 어떤 큰 문제도 매끄럽게 다룰 수 있고, 비듬과 여드름 그리고 개인적인 불안 등에 대해서도 당연히 쓸 수 있었다고 그는 고백했다.

언어의 연금술사인 시인의 고백이 아니더라도 필리핀의 영어교육은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지적되었다. 학생들은 영어학습의 기회를 얻는 대신 다른 과목들을 깊이 있게 학습할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 특히 과학과 수학을 제대로 배울 수 없었다. 문학의 딜레마도 변함이 없다.

민주화 운동의 과정을 거치면서 필리핀어는 공용어의 지위를 획득했지만 필리핀에서 영어의 지위는 확고하다. 주요과목의 수업은 여전히 영어로 이루어진다. 미국인에 의한 영어교육이 시작된 지 108년, 필리핀인들이 손에 쥔 손익계산서는 너무나 초라하다.

그들이 영어를 잘해서 얻는 가장 큰 이익은 필리핀에 진출한 외국기업에 취업해서 조금 나은 급여를 받는 것이었다. 그나마 세월이 흐르면서 그 특혜도 점점 줄었다. 또다른 이익은 외국 취업이었지만 그들이 얻는 일자리는 거의 대부분 가정부나 단순 노무직이었다.

외국기업과 관광객 유치 효과를 꼽는 이들도 있지만, 영어가 기여한 정도는 매우 회의적이다. 동남아에 진출하는 기업의 대부분은 값싼 노동력과 현지의 시장규모에 관심을 둘 뿐이다. 영어의 힘으로 필리핀이 유치하는 사업은 영어권의 콜센터 정도다. 그 대가로 그들이 지불한 항목은 너무나 뼈아픈 것이다. 자신의 언어, 문화, 정신에 대한 신뢰와 자부심. 108년의 영어교육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에서 영어로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가능한 인구는 절반에 불과하다. 절반의 필리핀인들은 영어로 진행되는 사회정책과 정치적 쟁점, 문화활동에서 배제된 채 살아간다.

영어교육이 필리핀에 안겨준 손익계산서는 한국사회가 수립해야 할 영어정책의 방향을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언어정책의 일부로 영어가 다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몽골의 울란바토르 대학교에서는 매년 한글날이면 한글대회가 열린다. 베트남의 국립 하노이대학교에서도 해마다 한국어 말하기 대회가 성황을 이룬다. 미신이 되어 버린 영어에 국민을 몰아넣는 일에 쏟아넣겠다는 4조 원의 예산 절반만 한글을 세계에 보급하고, 외국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고급인력양성에 투입한다면 한글은 세계적인 언어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고, 세계 각국의 언어로 생산된 뛰어난 지적 성과물들이 빠짐없이 번역되어 한국어로 거듭 태어날 것이다.

영어가 아닌 한국어가 최고의 경쟁력을 가질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국가의 언어정책이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에 더 이상 눈감아서는 안 된다. 영어를 포함한 외국어 교육이 강화될 필요성은 있다. 그러나 그 최종적인 목적은 한국어의 경쟁력을 높임으로써 한국인의 언어 경쟁력, 지적 경쟁력을 극대화하는 총체적인 언어정책에 귀속되어야 한다.

소설가·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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