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영화 25번째 ‘천만’ 초읽기
- ‘김은희 작가 남편’ 장항준 감독
- 대중 호감 커…존재감 커질 듯
- 유해진, 크레딧 1번 첫 대기록
- 박지훈 눈빛연기 단종앓이 유발
그 누가 예측했을까.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이하 ‘왕사남’)가 극장가를 ‘붐업’ 시킬 줄. 영화 흥행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3·1절 하루에만 81만 관객을 동원하며 개봉 4주 차에 일일 최다 기록을 갈아치운 ‘왕사남’은 지금 속도로 볼 때 이르면 6일, 늦어도 주말에 1000만 영화 대열에 오를 전망이다. 이는 역대 34번째, 한국 영화로는 25번째 기록이다. 사극으로 좁혀서 바라보면 ‘왕의 남자’(2005),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명량’(2014)에 이어 네 번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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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 각각 단종과 엄흥도를 연기한 배우 박지훈(왼쪽)과 유해진. |
이번 흥행으로 “윤종신이 임보(임시보호)하고 (아내) 김은희 (작가)가 입양한 눈물 자국 없는 말티즈”로 수식돼 온 장항준 감독의 입지는 큰 변화를 겪을 전망이다. 장항준 감독은 2002년 영화 ‘라이터를 켜라’로 연출 데뷔했지만 흥행과는 큰 인연이 없었다. 예능에서 화려한 입담을 발휘한 것과 대비해, 연출에서는 별다른 매력을 보여주지 못 해온 것도 사실. 하지만 이번 흥행으로 영화계에서도 존재감을 확실하게 심게 됐다. ‘감독 장항준이 1000만을 달성하는 모습’을 관객이 보고 싶어 하는 분위기도 특기할 만한데, 사람 좋기로 소문난 장항준 특유의 기질이 사람들 사이에서 호감으로 비치면서 영화에도 장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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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항준 감독이 연출 하고 배우 박지훈 과 유해진이 주 연을 맡은 영화 ‘왕과 사는 남 자’의 한 장면. |
‘왕사남’의 흥행으로 배우들도 커리어에 굵직한 이정표를 긋게 됐다. 엄흥도 역을 맡은 유해진의 1000만 돌파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2005년 ‘왕의 남자‘를 시작으로 2015년 ‘베테랑’, 2017년 ‘택시운전사’, 2024년 ‘파묘’로 무려 4번이나 1000만 고지를 밟은 바 있다.
그러나 이번엔 의미가 남다르다. 크레딧 1번에 이름을 건 영화로는 첫 1000만 영화이기 때문이다. 한땐 영화에 코믹함을 더하는 감초 연기자 이미지가 강했지만, 지금은 큰돈이 오가는 영화 산업에서 1인분 이상의 역할을 해내는 주연 배우로 발돋음했다.
박지훈이라는 새로운 스타 탄생은 ‘왕사남’이 영화계에 안긴 선물이다. 프로젝트 그룹 워너원 때에도 (소녀들의) 스타이긴 했으나, 단종을 연기한 이번 영화의 흥행으로 보다 넓은 팬층을 아우르는 무비 스타가 됐다. 전국에서 쏟아지고 있는 ‘단종 앓이’의 출발점에 박지훈의 눈빛이 있었다는 점도 특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존재감은 물론이거니와 연기력 면에서도 그 누구도 반기를 들 수 없는 재량을 보여준 만큼, 앞으로 배급사 제작사들의 캐스팅 테이블에 1순위로 자주 호출될 것으로 보인다.
멜로 영화 ‘만약에 우리’로 2026년을 기분 좋게 출발한 투자배급사 쇼박스는 ‘왕사남’까지 흥행하며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연상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전지현이 주연을 맡은 ‘군체’가 하반기 라인업으로 대기 중인 만큼, 올해 농사에 대한 기대감을 더욱 높이고 있다.
‘왕사남’은 흠결이 없는 영화가 아니다. 실제로 만듦새에 대한 아쉬움은 개봉 초기부터 흘러나왔다. 그런데 대중은 왜 이 영화에 이렇게 열광하는 걸까. 1000만 영화의 운명은 단순히 작품성이나 오락성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보다, 당대 대중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왕사남’은 조선시대 단종의 비극적 운명을 다루면서도, 정치적 격량보다는 민초들과 어린 왕이 정을 쌓아나가는 과정에 더 주목한 영화다. 불합리하게 자리에서 물러난 왕을 통해 “‘실현되지 못한 정의는 잊혀도 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중이 관객 마음에 적중된 면이 있어 보인다. 단종 관련 콘텐츠는 많지만, 정작 단종이 주인공인 작품은 없었다는 점이 관객들로 하여금 ‘왕사남’을 신선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역할로 작용하기도 했다.
물론, 이 모든 건 결과론적인 이야기다. 다시 강조하지만, 영화 흥행은 아무도 모르는 법이니까.
그렇다면 남은 질문. ‘왕사남’의 흥행으로 침체를 겪던 극장가는 다시 반등할까. 단정할 수는 없다. OTT로 영화를 즐기는 문화가 기본값으로 자리 잡은 만큼, 영화 한 편의 흥행으로 극장의 미래를 낙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왕사남’의 흥행으로 한 가지는 확실하게 확인했다. 극장으로 달려가기 위해 준비된 관객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정시우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