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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휘의 시네필] 폴 토마스 앤더슨(PTA), 깊이를 잃되 시사성을 얻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 조재휘 영화평론가
  •  |   입력 : 2025-10-15 19:23:28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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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토마스 앤더슨(PTA)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2025)에 앞서 토마스 핀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인히어런트 바이스’(2014)를 만든 바 있다. 히피 문화가 끝물을 향해가던 1970년대 초현실주의적 분위기로 펼쳐지는 미국의 근현대사에 대한 회고적 매혹과 비판적 성찰은 ‘리코리쉬 피자’(2021)로도 이어지는데, 그래서 핀천의 ‘바인랜드’를 원작으로 삼는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이러한 흐름과 주제 의식의 연속성을 떠올렸을 법하다. 반동과 혁명적 분위기가 뒤엉킨 시대 속에서 개인의 삶이 처한 위태로움과 정신적 혼란을 치밀하게 고증된 시대상과 교직해 그린 영화가 되리라 내심 짐작했던 것이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한 장면.
그런데 소설과의 연관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감독은 ‘느슨하게 영감을 받았(loosely inspired)고’ ‘각색할 때는 책을 훨씬 더 거칠게 다뤄야한다’는 미묘한 표현을 쓰고 있다. 결정적인 차이는 시간대의 설정에서 발생한다. 1984년의 시점에서 쇠락해 버린 히피와 급진주의자들의 현실이 그들의 전성기였던 1960년대의 기억과 교차하던 소설의 이야기는 페이스북과 스마트폰이 존재하는 현재와 자칭 혁명가 그룹인 ‘프렌치 75’가 이민자 수용소를 습격하던 16년 전으로 뒤바뀌어 있다.

2000년대 미국에 무장투쟁 노선의 좌익 집단이 있었는가 여부는 차치해두더라도, 68혁명의 여파가 세계를 휩쓸었으며 베트남전 반대 시위를 둘러싸고 계층과 진영이 나뉘어 격렬하게 충돌한 시대의 급진적인 맥락이 증발하면서, 영화는 시드니 루멧이 ‘허공에의 질주’(1988)를 통해 담아냈던 가족드라마의 진실성을 재현하는 데는 실패한다. 엔딩에서 퍼피디아(테야나 테일러)의 편지가 감정적 울림을 얻지 못하고 내러티브에서 허무하게 겉도는 건 블랙코미디의 거리감과 더불어 바로 이러한 디테일, 시공간적 구체성의 결여 때문이다.

다만 ‘데어 윌 비 블러드’(2007)와 ‘마스터’(2012), ‘팬텀 스레드’(2017)의 감독이 이처럼 플롯의 골격만을 취하는 앙상한 모델화의 문제를 몰랐을 리 만무하다. 어쩌면 폴 토마스 앤더슨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자기 경력에 일찍이 없었던 가장 대중적인 1억3000만 달러짜리 블록버스터 모험 활극이자 일종의 신나는 외도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작중 ‘알제리 전투’(1966)를 슬쩍 인용하지만, 영화의 심층에 자리한 레퍼런스는 존 포드의 ‘수색자’(1956)이다. 미국의 얼굴 존 웨인이 연기했던 전직 군인 이든은 왕년의 혁명가 밥 퍼거슨(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과 스티븐 록조 대령(숀 펜) 두 사람으로 분열해 인디언의 일원이 된 데비를 대신해 윌라(체이스 인피니티)를 쫓는다. 실상 혈연이 아니지만 가족으로서 윌라를 되찾으려는 밥과 친자이지만 순혈 백인우월주의자이기에 혼혈 딸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는 록조의 대비는 오늘날 진영이 갈라진 미국의 두 얼굴을 반영한다.

이건 차라리 당대의 시사를 풍자하고자 만든 일종의 가상 역사이자 우화라 보아야 옳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작품으로서는 가장 층위가 얕고 평면적인 영화이지만, 시선의 깊이와 통찰력을 잠시 제쳐둔 대가로 시의적절한 정치적 메시지의 현시적 포즈, 비스타비전 포맷과 이동 카메라, 망원렌즈의 전격적인 활용에 힘입어 질주하는 영화적 테크닉의 활력과 재미를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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