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조재휘의 시네필] 허무와 절망의 청춘을 위로하며

‘브레이킹 아이스’

  • 조재휘 영화평론가
  •  |   입력 : 2025-06-18 18:35:50
  •  |   본지 14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브레이킹 아이스’(2023)는 얼어붙은 강의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한겨울에 사람들은 톱을 켜서 얼음덩이를 썰어내고, 잘려 나간 조각은 극지의 바다 위를 떠다니는 유빙(流氷)처럼 매여 있던 자리를 벗어나 두둥실 흘러간다. 이 장면은 영화의 핵심과 전개를 함축한다. 머묾과 떠남. 영화 내내 눈여겨봐야 하는 건, 극의 상황과 맞물리며 물의 이미지가 변형되는 일련의 과정이다. 얼음의 형태로 고체화된 물은 죽어있는 정물에 지나지 않지만, 외부의 힘을 만나 떨어져 나가면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정(靜)에서 동(動)으로, 결빙(結氷)에서 해빙(解氷)에 이르는 이행의 과정이다.
영화 ‘브레이킹 아이스’의 한 장면.
여행가이드로 관광객을 상대하는 나나(주동우), 상해를 떠나 관광을 와서 우여곡절을 겪고 나나와 안면을 트게 된 하오펑(류호연), 나나에게 연심을 품고 있지만 친구 사이 이상의 선은 넘지 못하는 샤오(굴초소).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 일주일을 함께 하며 이들이 형성하는 묘한 삼각관계와 일탈의 로드무비는 감독 안소니 첸이 ‘쥴 앤 짐’(1962)과 ‘국외자들’(1964)로부터 받았을 영향을 짐작게 한다. 그러나 영화의 실상은 무협의 외양을 쓰지 않은 ‘동사서독’(1994)에 가깝다.

‘브레이킹 아이스’의 세 청춘남녀는 왕가위의 인물들과 상당한 유사성을 지닌다. 나나는 한때 피겨스케이팅 유망주였던 과거의 꿈이 좌절된 상처를 안은 채 현재를 무표정한 유령처럼 살고 있고, 하오펑은 부모가 지어준 삶의 목적을 달성해 상해 금융계에서 일하는 인텔리이지만 필요 이상의 인간관계를 극도로 회피하며, 샤오는 이렇다 할 목적의식 없이 친척의 식당에서 일하며 하루하루를 때우고 있다. 각자의 처지는 다르지만 이들 세 사람은 저마다의 결핍을 안은 채 현재에 매여 있는 청춘 군상이라는 점에서 하나로 묶인다. 밤거리를 쏘다니던 세 사람이 얼음벽의 미로 속을 헤매는 장면은 고착화된 현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청춘의 처지와 무의식적인 갈망을 시각적으로 은유한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구(詩句)처럼 얼음과 불의 대비는 인물의 변화를 드러내는 장치이다. 나나와 샤오는 흡연자라는 공통점이 있고, 하오펑은 두 사람과 친구가 되면서 그 영향으로 담배를 입에 물게 된다. 얼음을 깨물어 부수려한 버릇이 고립된 삶의 자폐성을 바꾸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면, 주변과 일정한 거리를 두던 그가 샌님의 티를 벗고 세속적 욕망의 열기에 몸을 맡길 줄 알게 되는 변화는 고요하고 정적이지만 녹아 흘러내리는 물의 이미지로 분명하게 강조된다. 때때로 무상(無常)의 이미지는 액체적 형상으로서뿐만 아니라 백두산에 흩날리는 눈보라처럼 고체이지만 가변적인 형상으로도 가시화된다.

목적지인 천지에 도달하진 못하지만, 여행이 있고 나서 세 사람은 각자의 인생행로를 향한 걸음을 내디딘다. ‘동사서독’에서 구양봉이 움막을 불사르고 떠나갔듯, 나나는 옛꿈을 되찾고자 짐을 정리하고, 공부와 담쌓았던 샤오는 책을 싸 들고 어딘가로 향한다. 얼어붙은 고드름이 찾아온 봄의 온기에 녹아내리듯, 새로운 삶을 향한 갈망은 멈춰있던 이들의 시간을 다시금 흐르게 해, 기존 것들을 끊어내고 생성과 변이로 이끄는 것이다. 이로써 ‘브레이킹 아이스’는 허무와 절망의 현실에 매인 청춘을 위로하는 하나의 전언(傳言)이 되고자 한다.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신문 뉴스레터
국제신문 네이버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뭐라노 뉴스

 많이 본 뉴스RSS

  1. 1부캉이가 남기고 갈 ‘북항 활성화·기후 대응’ 숙제
  2. 2세입자 보증금 안 준 前 금정구의원…추가 피해 확산
  3. 3구·군 부단체장 출퇴근 의전 논란, 부산 5곳 폐지 결정…4곳은 “고수”
  4. 4부산국제영화제 11년 만에 ‘관객 20만’ 재돌파
  5. 5김도영의 KIA냐, 오스틴의 LG냐
  6. 6아파서도, 부적응도 아니다…고교 자퇴 71% ‘내신 세탁용’
  7. 7[정가 인&아웃] 지역현안 해결사 이헌승 국힘 부산 국회의원, 국제신문 회생에도 팔 걷어
  8. 8민주항쟁사 한 폭에 담은 작가 “부마정신 헌법에”
  9. 9부산TP 수장 중기부 승인…신임 기관장들 내주 취임
  10. 107.5% 폭락 ‘녹아내린 코스피’…7000서 7일 만에 5500으로(종합)
  1. 1[정가 인&아웃] 지역현안 해결사 이헌승 국힘 부산 국회의원, 국제신문 회생에도 팔 걷어
  2. 2北, 잠수함발사 전략순항미사일 2종 시험발사(종합)
  3. 3‘신천지 與 입당 정황’ 친청계 반발…“김 대표, 조사 과정 제대로 밝혀라”(종합)
  4. 4北 "전날 동해서 2종 잠수함발사 전략순항미사일 시험발사"
  5. 5신임 靑 비서실장에 임광현 국세청장(종합)
  6. 6김민석 격주 부산행 PK 민심잡기…부마항쟁 기념식 찾는다
  7. 7이 대통령 "부마항쟁 헌법 조문화, 이제는 실천할 때"
  8. 8김민석, 강훈식 서울시장 후보론에 “가능성 열려있다”
  9. 9강훈식 다음 수순은 서울시장 출마?(종합)
  10. 10李 대통령 지지율, 2주 전보다 소폭 오른 44%…부정 평가 49%
  1. 1부산TP 수장 중기부 승인…신임 기관장들 내주 취임
  2. 27.5% 폭락 ‘녹아내린 코스피’…7000서 7일 만에 5500으로(종합)
  3. 3누리호 탄 군집위성, 발사 14시간 만에 첫 지구 촬영 성공
  4. 4‘신뢰 시그널’ 없는 증시…외인 이달만 18조 투매
  5. 540돌 수산무역협회도 부산시대 연다
  6. 6모건스탠리 “고물가 고착화 위험에 한은 내달 금리 올릴 듯”
  7. 7AI 투자 회의론 고개…글로벌 반도체주 ‘먹구름’
  8. 8부산항에 석유 보세구역…북극항로 선박연료 생산·공급
  9. 9커피향 가득한 미래 작가들 ‘사랑방’
  10. 10주가지수- 2026년 10월 15일
  1. 1부캉이가 남기고 갈 ‘북항 활성화·기후 대응’ 숙제
  2. 2세입자 보증금 안 준 前 금정구의원…추가 피해 확산
  3. 3구·군 부단체장 출퇴근 의전 논란, 부산 5곳 폐지 결정…4곳은 “고수”
  4. 4아파서도, 부적응도 아니다…고교 자퇴 71% ‘내신 세탁용’
  5. 5민주항쟁사 한 폭에 담은 작가 “부마정신 헌법에”
  6. 6“장림항 레저보트 철수명령 정당” 대법 확정
  7. 7예고 임용강사·학원장 겸직, 전국서 부산예고 가장 높아
  8. 8오늘의 날씨- 2026년 10월 16일
  9. 9거짓자백 받았나…法, 17년전 ‘창원 택시기사 살인’ 재심청구 인용
  10. 10불법정치자금 수수 혐의, 배재정 전 의원 실형 구형
  1. 1김도영의 KIA냐, 오스틴의 LG냐
  2. 2득점은 킹, 리바운드는 롱…KCC 살릴 ‘믿을맨’ 찾았다
  3. 3자금 숨통 틔웠다…LIV골프 살아날까
  4. 4프로야구 역대급 흥행에도 쪼그라든 ‘거인 팬심’
  5. 5[뭐라노] 롯데, 이젠 성찰할 때
  6. 6인종차별 당한 엄지성…英 경찰 수사
  7. 7거인 3년 연속 7위…레이예스·한동희는 날았다
  8. 8황성빈은 첫 도루왕…끝까지 뜨거웠던 타이틀 경쟁
  9. 9한화, 새 사령탑에 류지현…3년 20억원
  10. 103년 無가을로 계약 만료…김태형 감독 운명은?
우리은행
부산 야구장 미래는
선수 공간까지 체험하는 돔투어…야구 테마 복합문화시설
부산 야구장 미래는
경기 7시간 전 입장해 쇼핑·식사…종일 즐기는 교세라돔
  • 국제신문 골프대회
  • 맘편한 부산
  • 부산국제마라톤
  • BNK생명나눔챌린지
  • 유콘서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