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킹 아이스’(2023)는 얼어붙은 강의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한겨울에 사람들은 톱을 켜서 얼음덩이를 썰어내고, 잘려 나간 조각은 극지의 바다 위를 떠다니는 유빙(流氷)처럼 매여 있던 자리를 벗어나 두둥실 흘러간다. 이 장면은 영화의 핵심과 전개를 함축한다. 머묾과 떠남. 영화 내내 눈여겨봐야 하는 건, 극의 상황과 맞물리며 물의 이미지가 변형되는 일련의 과정이다. 얼음의 형태로 고체화된 물은 죽어있는 정물에 지나지 않지만, 외부의 힘을 만나 떨어져 나가면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정(靜)에서 동(動)으로, 결빙(結氷)에서 해빙(解氷)에 이르는 이행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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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브레이킹 아이스’의 한 장면. |
여행가이드로 관광객을 상대하는 나나(주동우), 상해를 떠나 관광을 와서 우여곡절을 겪고 나나와 안면을 트게 된 하오펑(류호연), 나나에게 연심을 품고 있지만 친구 사이 이상의 선은 넘지 못하는 샤오(굴초소).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 일주일을 함께 하며 이들이 형성하는 묘한 삼각관계와 일탈의 로드무비는 감독 안소니 첸이 ‘쥴 앤 짐’(1962)과 ‘국외자들’(1964)로부터 받았을 영향을 짐작게 한다. 그러나 영화의 실상은 무협의 외양을 쓰지 않은 ‘동사서독’(1994)에 가깝다.
‘브레이킹 아이스’의 세 청춘남녀는 왕가위의 인물들과 상당한 유사성을 지닌다. 나나는 한때 피겨스케이팅 유망주였던 과거의 꿈이 좌절된 상처를 안은 채 현재를 무표정한 유령처럼 살고 있고, 하오펑은 부모가 지어준 삶의 목적을 달성해 상해 금융계에서 일하는 인텔리이지만 필요 이상의 인간관계를 극도로 회피하며, 샤오는 이렇다 할 목적의식 없이 친척의 식당에서 일하며 하루하루를 때우고 있다. 각자의 처지는 다르지만 이들 세 사람은 저마다의 결핍을 안은 채 현재에 매여 있는 청춘 군상이라는 점에서 하나로 묶인다. 밤거리를 쏘다니던 세 사람이 얼음벽의 미로 속을 헤매는 장면은 고착화된 현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청춘의 처지와 무의식적인 갈망을 시각적으로 은유한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구(詩句)처럼 얼음과 불의 대비는 인물의 변화를 드러내는 장치이다. 나나와 샤오는 흡연자라는 공통점이 있고, 하오펑은 두 사람과 친구가 되면서 그 영향으로 담배를 입에 물게 된다. 얼음을 깨물어 부수려한 버릇이 고립된 삶의 자폐성을 바꾸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면, 주변과 일정한 거리를 두던 그가 샌님의 티를 벗고 세속적 욕망의 열기에 몸을 맡길 줄 알게 되는 변화는 고요하고 정적이지만 녹아 흘러내리는 물의 이미지로 분명하게 강조된다. 때때로 무상(無常)의 이미지는 액체적 형상으로서뿐만 아니라 백두산에 흩날리는 눈보라처럼 고체이지만 가변적인 형상으로도 가시화된다.
목적지인 천지에 도달하진 못하지만, 여행이 있고 나서 세 사람은 각자의 인생행로를 향한 걸음을 내디딘다. ‘동사서독’에서 구양봉이 움막을 불사르고 떠나갔듯, 나나는 옛꿈을 되찾고자 짐을 정리하고, 공부와 담쌓았던 샤오는 책을 싸 들고 어딘가로 향한다. 얼어붙은 고드름이 찾아온 봄의 온기에 녹아내리듯, 새로운 삶을 향한 갈망은 멈춰있던 이들의 시간을 다시금 흐르게 해, 기존 것들을 끊어내고 생성과 변이로 이끄는 것이다. 이로써 ‘브레이킹 아이스’는 허무와 절망의 현실에 매인 청춘을 위로하는 하나의 전언(傳言)이 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