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과 ‘프렌치 디스패치’(2021)에서 웨스 앤더슨은 2차 세계대전 이전과 68혁명 시기의 유럽을 애정과 상상으로 변형된 동화의 시공간으로 재구성하며, 한 시대의 상실을 애상 어린 심정으로 돌이켜 본 바 있다. 벨 에포크 시대의 우아함과 기품을 간직한 지배인의 죽음, 그리고 과거의 예술과 잡지 시절 저널리즘의 종말. 과거로 향하며 그 시절에 있었을 낭만과 진정성의 세계로 한껏 끌어당기고는, 다시금 관객을 그 모든 것이 실종되어 버린 현재로 되돌려놓는 화술은 메마른 현대 사회를 거부하고자 하는 시대착오적 낭만주의자의 발로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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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페니키안 스킴’의 한 장면. |
‘페니키안 스킴’(2025)은 현대의 우화이다. 영화는 거물 사업가 자자 코다(베니시오 델 토로)가 수련수녀인 외동딸 리즐(미아 트리플턴)과 함께 암살 시도와 좌초의 위기를 넘기면서 필생의 프로젝트를 완수하는 과정을 그린다. 원근감을 압축해 평면화하는 딥 포커스와 대칭적 구도의 촬영, 양식화된 연기와 미술 등 감독의 인장은 여기서도 어김없다. 다른 건 이번에는 상실이 아닌 회복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슬로 모션과 부감으로 열리는 타이틀 백은 주인공의 본질을 묵시적으로 드러낸다. 욕조에서 식사하면서 고용인들의 시중을 받는 자자의 모습은 축적한 부와 권력의 크기를 보여준다. 하지만 누구와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말 한마디 걸지 않는 데서 단절된 자의 고독과 소외감, 바닥의 타일 문양 말고는 텅 비어 있는 프레임 중앙의 공백으로는 영혼의 공허함이 드러난다. 딸 리즐을 상속인으로 지명할 때도 인물을 작아 보이게 하는 저택의 수직적 공간감, 어떠한 온기도 띠지 않는 잿빛의 회색 조로 칠해진 배경은 이윤의 증식에만 골몰해 온 차가운 사업가의 황량한 내면세계 그 자체이다.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코다의 주변은 점점 다양한 색조로 물들게 된다.
자자 코다라는 인물의 우스꽝스럽고도 섬뜩한 점은 그가 근본까지 글러 먹은 악인은 아니지만, 자신이 종사하는 일에 일말의 회의나 죄책감 한 번 품어본 적 없다는 도덕적 무감각에 있다. 의식을 잃고 사후세계에서 신(빌 머레이)을 만난 그가 임금을 주는데도 노예제가 잘못된 것인지를 묻는 대목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식의 천진함 때문에 할 말을 잃을 지경. 리즐은 청빈을 중시하는 독실한 가톨릭 신도임에도 사치스럽게 장식된 파이프로 담배를 태우고, 수녀원장은 리즐을 환속시키면서도 수도원에 대한 지원금을 바라는 위선적인 속물이며, 동업자는 사업상의 중요한 결정을 농구 시합으로 내리는 비합리성을 보여준다. ‘페니키안 스킴’은 온통 아이러니함으로 가득 찬 현대 사회의 요지경을 비꼬는 풍자극이 되고자 한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는 냉혈한처럼 보이던 자자는 딸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달라진다. 감정이 고장 난 개인이 소통과 교감에 눈을 뜨는 영적 성숙의 여정. 재산을 몽땅 잃긴 했지만, 인생에는 항상 반대급부가 따르기 마련 아니던가? 세상은 한결 나아졌고, 작은 식당을 경영하면서 부녀지간에 스스럼없이 포커를 치는 하루의 소박한 행복이, 부유하지만 외로웠고 누군가에 대한 착취로 유지되던 예전의 삶을 대체하며 대구를 이룬다. ‘페니키안 스킴’은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다시금 던져진 디킨스식 동화, 우리 시대의 ‘크리스마스 캐롤’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