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리적 딜레마·일자리 위협에도
- ‘거스를 수 없는 흐름’ 인식되기도
독립 영화 ‘아노라’의 대약진 속에서 지난 2일(현지 시각) 막을 내린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화두 중 하나는 인공지능(AI)이었다. 2023년 할리우드 작가·배우조합 파업의 핵심 쟁점이었던 ‘AI 사용에 대한 갈등’이 재점화되는 양상을 보이면서, 향후 아카데미 출품작 선정에서 AI가 하나의 변수로 떠오를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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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쪽부터 올해 아카데미상 10개 부문 후보에 오른 ‘브루탈리스트’(감독 브래디 코베), 뮤지컬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감독 자크 오디아르), 톰 행크스 주연 작품 ‘히어’(감독 로버트 저메키스) 한 장면. 최근 AI와 영화를 둘러싼 논쟁을 촉발한 작품들이다. |
AI 논란의 시발점은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등 10개 부문에 후보를 올린 브래디 코베 감독의 ‘브루탈리스트’였다. 미국 배우 에이드리언 브로디가 연기한 헝가리 건축가 라즐로의 헝가리어 대사에 AI 음성 변환 기술이 사용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문제가 됐다. 외국어 발음에 기술의 힘을 빌리는 건 반칙 아닌가? 실제로 에이드리언 브로디의 남우주연상 후보 자격을 문제 삼는 논평이 일부에서 터져 나왔다.
‘브루탈리스트’에서 촉발된 AI 논쟁은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뮤지컬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와 밥 딜런 전기 영화 ‘컴플리트 언노운’으로도 옮겨붙었다. ‘에밀리아 페레즈’는 주연배우 칼라 소피아 가스콘이 노래하는 장면에서 가창 범위를 확장하는 음성 복제술을 적용한 사실이 밝혀졌다. 가창력이 하나의 능력으로 평가받는 뮤지컬 장르에서 음성 기술이 활용됐기에, 이를 둘러싼 의견은 더욱 첨예하게 대립했다. ‘컴플리트 언노운’의 경우 주인공이 오토바이를 타는 장면에서 AI의 도움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결과적으로 ‘브루탈리스트’의 에이드리언 브로디는 논란을 이겨내고 생애 두 번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러나 기대를 모았던 작품상·감독상을 모두 ‘아노라’에게 넘겨준 걸 두고 일각에선 ‘브루탈리스트’의 AI 논란이 아카데미 회원들의 투표를 주저하게 한 것 아니냐는 평가도 나온다. ‘에밀리아 페레즈’도 최다 부분에 후보를 올리고도 2개의 트로피(여우조연상·주제가상)에 만족해야 했다.
AI 기술이 지닌 윤리적 딜레마를 엄중하게 바라보는 시선 반대편엔, AI가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고 보는 분위기도 많다. 실제로 할리우드는 이미 AI 기술을 여러 분야에서 적극 활용하는 중이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건, 디에이징(de-aging) 기술이다. ‘인디아나 존스5’(2023)에서 80대 해리슨 포드는 이 기술을 통해 40대로 회춘한 바 있다. 할리우드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 역시 ‘아이리시맨’(2019)에서 노년의 로버트 드 니로와 알 파치노에게 젊음을 선사했다.
디에이징 기술은 국내에서도 활용이 잦아지는 추세다.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카지노’(2022)에서 30대의 최민식을 만날 수 있었던 배경엔 이 기술이 있었다. 넷플릭스 드라마 ‘살인자 ㅇ난감’(2024)은 또 다른 AI 기술로 눈길을 끈 경우. 배우 손석구를 너무나 닮은 아역이 등장해 ‘아역 배우의 정체’를 두고 관심이 쏟아졌다. 하지만 손석구의 어린 시절 사진을 3D로 변환 뒤 아역배우 강지석 얼굴에 합성한 딥페이크(deep-fake) 기술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갑론을박이 일었다.
AI는 죽은 사람을 스크린에 되살리기도 한다. 지난해 개봉한 ‘에이리언: 로물루스’는 2020년 세상을 떠난 배우 이안 홈을 AI 형태로 등장시켰다. 이안 홈은 1979년 개봉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원조 ‘에이리언’에서 인조인간 캐릭터 애쉬를 맡았던 배우로 일부 원작 팬들은 반가워했지만, 영화 안팎으로 윤리적 논란이 불거졌다. ‘스타워즈: 로그 원’ 역시 1994년 사망한 피터 쿠싱(타킨 장군 역)을 AI 기술로 부활시킨 바 있다.
3D 영화에 오랜 시간 몰두해 온 로버트 저메키스는 최근, AI 기술을 작품 전체에 적용한 장편 영화를 내놓았다. 톰 행크스 주연의 ‘히어’가 그 주인공. 로버트 저메키스는 AI가 비용 절감과 시간 절약, 한계 확장 면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평한다.
그러나 아직 여러 문제가 산적해 있다. 디에이징은 특수분장사나 시각효과 전문가들의 설 자리를 위협한다. ‘살인자ㅇ난감’에서 존재감이 가려진 아역 배우 강지석처럼 딥페이크는 노동권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브루탈리스트’ 사례에서 보듯, 배우의 창의성 자체가 도마 위에 오르기도 한다.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윤리적 가이드라인 구축에 대한 필요성이 업계에서 제기되고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