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들’(2022)은 단순하고 간결한 구성의 도입부를 갖는다. 연극 공연을 위해 무대의 중심에 선 여배우는 원형의 팔로우 핀 라이트 안에서 독백 장면을 연기하며 환희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충만했던 행복의 순간은 점점 연기에 자신감을 잃고 대사를 우물쭈물거리는 배우의 당혹감과 불청객처럼 울리는 알람 소리에 의해서 깨어진다. 잘 만든 영화들이 대개 그러하듯, 이 도입부는 언뜻 무심해보이지만 연출의 의도와 영화의 주제를 명료히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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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역할들’ 스틸 컷. |
연기를 위한 공간과 기회가 주어질 때에야 배우는 존재의 의미를 얻는다. 그러나 정작 무대 공간은 꿈의 세계이며, 깨어난 현실에서 이들은 복싱을 하고, 이삿짐센터에서 일하고, 길거리에서 김밥을 팔고, 선배의 잔소리에 시달리는 등, 연기가 아닌 다른 일로 생계를 해결하며 배역이 없는 나날을 버티어나간다. 결국 이 영화는 자신의 천복(天福)을 붙잡아 무대에 서고 싶지만, 그에 도달하기까지 기약 없고 지난한 일상의 중력을 견뎌내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 영화의 연출은 철저히 미니멀리즘에 입각해있다. 연송하 감독은 연극 무대의 연장선상에서 ‘역할들’을 이끌고 간다. 건조한 미장센 속에서 고정된 카메라에 풀 샷으로 찍은 한 호흡의 롱테이크가 이야기의 한 단락으로 한 신을 이루고, 상업영화에서 봄직한 복잡다단한 편집의 기교나 이동촬영의 역동성은 일체 배제되어 있다. 이러한 방식은 배우 출신 감독이 스스로의 입장에 입각해 고안한 독학자의 영화 스타일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독립영화의 어려운 제작 여건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평면적인 화면에 사선 구도로 입체감을 만들어낸다던가, 컷을 분절하는 대신 거울을 걸쳐 찍어 반응까지 동시에 잡아내는 등, 영화적인 감각을 살리기 위한 노력이 종종 엿보인다. 고정된 숏이라도 장면의 상황과 감정, 동선을 고려해 프레이밍이 세심히 조정되어 있는데, 예를 들어 여배우 혼자서 전화로 하소연하는 대목과 침대에서 어머니와 대화하는 장면의 경우 전자는 인물을 중심에 고립시키면서 천정을 높게 잡아 인물이 중압감에 짓눌리고 있다는 인상을, 후자는 침대 위아래를 경계로 두 인물을 나누면서 소통이 차단되어 있다는 느낌을 만들어내며 무명배우가 겪는 삶의 고단함을 영상으로 웅변한다.
배우라 하면 영화제에서 레드카펫을 밟고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화려한 면면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찬사와 영광의 뒤안길에는 많은 조연, 단역 배우들이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소화하고는 생활전선으로 향하는 현실이 놓여 있다. 어쩌면 무명배우의 존재는 보잘 것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연과 단역이 받쳐주지 않으면 영화도 공연도 성립되지도 않듯, 때로는 별 볼일 없을 것 같은 존재들이 모여서 큰 일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 아닐까. ‘역할들’은 배우의 이야기로 출발하지만,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우리 삶에 대한 위로이자 찬가이기도 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