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도심을 누비는 자경단원의 활약상은 여러 차례 감독과 배우를 바꿔가며 리메이크되어왔다. 배트맨의 소환을 요구하는 인기의 이면에 깔린 건, 통제되지 않는 범죄와 불안한 정치상, 그리고 도시를 살아가는 대중의 심리에 깔린 근본적인 무력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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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더 배트맨’ 스틸 컷. |
‘배트맨‘(1989)에서 치안력의 공백을 메워줄 초법적 무력의 역할을 위임받았던 배트맨은 ‘배트맨 비긴즈’(2005)에서는 범죄를 넘어 테러리즘에 맞선다. ‘다크 나이트’(2008)에서는 세계금융위기 직후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는 불안과 혼란에 빠진 현실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다시 말해 배트맨은 피폐하고 어두운 현대 사회의 전망을 투영한 존재다. 그리고 ‘더 배트맨’(2022)은 우리 시대 공포의 실체와 조우하고자 암흑의 심연으로 걸어 들어간다.
맷 리브스는 과거 누아르 영화의 기품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더 배트맨’에 임한다. 탐정이 수사하는 과정에서 도시의 부패상을 발견한다는 큰 그림은 로만 폴란스키의 ‘차이나타운’(1974), 마찬가지로 수사극인 동시에 조명을 억제해 침울하리만치 어둡게 가라앉은 화면의 톤, 범죄를 과시하는 악역의 행적은 데이비드 핀처의 ‘세븐’(1995)과 ‘조디악’(2007), 사회부적응자이면서 스스로를 영웅으로 여기는 리들러의 과대망상증적 성격은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1976)에 나오는 트래비스를 상기시킨다.
“나는 복수다”라 외치는 말마따나 배트맨은 타오르는 복수심을 억제하지 못해 범죄자를 사냥하고 다닌다. 얄궂게도 이 대사는 리들러의 계획에 가담한 패거리의 입을 통해 그에게 고스란히 돌아온다. ‘더 배트맨’의 핵심은 주인공과 악역 간에 공유하는 상호유사성, 그럼에도 서로 이해할 수 없는 계급적 대립항의 설정에 있다. 브루스 웨인과 리들러는 고아의 처지로 고독한 삶을 산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전자는 대저택에 사는 현대 자본주의의 귀족이며 후자는 사회에의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골방에서 범죄에 골몰하는 아웃사이더이다.
둘 다 같은 동기를 공유하지만 배트맨의 복수가 부모를 살해하고 치안을 어지럽히는 밑바닥을 향해있다면, 반면 리들러의 복수는 주류 질서와 상류 계급을 향해있다. 비슷한 동기에 전혀 다른 계급성이라는 이 모순된 대립 구도의 치열함은 면회실 대면 시퀀스에서 극에 달한다. 시각적 개방과 물리적 차단. 구로사와 아키라의 ‘천국과 지옥’(1963)에서 가져왔음이 명백한 이 대목에서 둘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지만, 질서를 수호하는 보수주의자와 체제 전복을 도모하는 테러리스트라는 입장의 차이, 소통의 불가능성만을 확인할 뿐이다.
이러한 파국의 이면에는 재개발 이권을 둘러싼 비극이 도사리고 있다. 자본주의 발전의 과실을 누리는 상부와 그로부터 소외되고 희생된 하부. 건널 수 없는 깊고 넓은 골이 그 사이에 패여 있다. 정반대의 양극단으로 쪼개진 세계의 분열상. ‘복수’는 답이 될 수 없다. 문제는 ‘정의’인 것이다. ‘더 배트맨’은 아버지 세대로 표상되는 기성 질서의 실패를 짊어진 아들 세대 간의 투쟁에 관한 이야기다. 맷 리브스는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에서 놀란이 부자의 자선으로 봉합해버렸던 현실의 균열을 포착하고 극의 중심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점차 무력해져 가는 민주주의 체제의 황혼, 혐오와 폭력의 근원인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하는 시대의 우울한 풍경을 장르에 투영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