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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휘의 시네필] 삶이냐, 죽음이냐…중세 기사도 전설의 재해석

‘그린 나이트’

  • 조재휘 영화평론가
  •  |   입력 : 2021-08-25 18:34:18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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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 젊은 기사 가웨인이 어떤 시험을 당하고 있는지 알겠지요? 석가가 당한 것과 똑같은 시험입니다. 즉 욕망과 죽음의 공포로부터 시험을 당하고 있는 겁니다. (중략) 그런데 여기에서 가터가 걸립니다. 가웨인은 가터를 내어놓지 못합니다. (중략) 가웨인은 목을 한껏 늘입니다. 녹기사는 도끼로 내려찍습니다. 그러나 가웨인의 목은 잘리지 않습니다. 상처만 조금 났을 뿐. 그제야 녹기사는 사냥꾼인 본 모습을 드러내고는 가웨인에게 말합니다. ”그 상처는 가터 값이오.” 이것은 영국 가터 훈장의 기원 전설이기도 합니다.’ - 조셉 켐벨 ‘신화의 힘’
영화 ‘그린 나이트’ 스틸컷.
‘그린 나이트’(2021)는 아서왕 전설의 일부인 ‘가웨인 경과 녹기사’를 근간으로 삼는다. 그 이전에 존 부어맨은 걸작 ‘엑스칼리버’(1981)로 중세 기사도 설화를 다룬 서사극의 정형을 완성했고, 테리 길리엄과 코미디 그룹 몬티 파이선은 ‘몬티 파이선과 성배’(1975)를 통한 현대적인 재해석으로 기사를 풍자의 대상이자 웃음거리로 전락시킨 바 있다. 데이빗 로워리가 중세 기사도 전설을 다루는 방식은 두 영화사적 선배에 각각 한 발씩 걸치고 있는 모양새이다. 원전의 줄거리엔 경의를 표하며 충실하되, 그 안의 낭만주의에는 냉소를 보내며 충성, 절제, 용기와 같은 도덕적 가치를 산산조각을 내버린다는 것. 이것은 일종의 수정주의 영화이다.

먼저 주인공인 가웨인부터 모범적인 기사라 하기엔 불완전하고 흠결이 많은 인물로 각색되어 있다. 처음 등장할 때 그는 크리스마스 전날 밤을 술로 지새우며 경건함과는 담을 쌓았고, 망설임 없이 녹기사의 목을 친 원전에서의 대담한 용기는 영화에선 긴장과 불안이 극도에 달한 끝에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바뀌었다. 연인인 에셀과 버틸락 부인(알리시아 비칸데르의 1인 2역) 두 사람을 대하면서도 가웨인은 신분이 낮은 에셀은 버리고, 성주의 아내인 버틸락 부인의 유혹은 받아들이는 이중성을 보여준다. 고결함이라는 기사도 문학의 영웅주의적 이상은 철저히 난도질당하고 부정되는 것이다.

길을 가르쳐준 청년에게 푼돈을 던져준 댓가로 가웨인은 숲에서 강도를 당하는 역운(逆運)을 맞는다. 연못 바닥에 가라앉은 목을 찾아달라는 위니프레드의 부탁을 듣고도 그는 거래를 하듯 대가로 무엇을 줄 수 있는지를 되묻는다. 이때 가웨인이 육탈된 시신이 된 환상, 물에서 건져 올린 위니프레드의 두개골로 해골이 거듭 죽음을 상기시키는 오브제로 등장한다. 녹색도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어머니와 버틸락 부인에게서 받은, 목숨을 구하는 마법이 깃든 녹색 가터가 생명과 욕망을 뜻한다면, 녹기사의 도끼는 죽음을 상징하며, 가웨인은 가터로 표상되는 세속적 삶에의 미련과 도끼로 맞게 될 죽음 사이에서 양자택일의 딜레마에 처한다.

녹기사에게 목을 내미는 순간, 가웨인은 왕이 될 미래에 들이닥칠 흥망성쇠를 주마등처럼 예견한다. 그리고 녹색 가터를 내놓음으로써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진실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그린 나이트’는 중세 기사도 전설을 재해석하며 고전적 아우라를 파괴하지만 그럼으로서 도리어, 현세의 명예와 영광은 덧없고 무상(無常)하며 그러므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중세 기독교의 테마를 21세기 영화 속에 되살리는 역설을 실천해낸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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