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2019)에서 오정석 감독의 카메라는 시종일관 인물과 일정한 거리를 둔다. 와이드 숏을 즐겨 사용하면서 관객을 먼발치에서 내다보듯 관조하는 사람의 위치에 자리매김한다. 장면의 호흡도 길다. 롱테이크의 긴 호흡으로 일관하면서 영화는 인물의 동선과 생활 속 행동의 결들을 켜켜이 쌓아나간다. 이야기 또한 극적인 구성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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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여름날’의 한 장면. |
영화는 서울에서 생활하다 고향 거제도로 내려온 승희(김유라)가 바캉스철 손님으로 붐비는 해안에서 옛 친구를 만나고 할머니를 보살피는가 하면, 낚시를 하던 도중 한 청년(김록경)을 만나 조금씩 관계를 맺어가는 일련의 과정들을 쭉 훑을 뿐이다. 어떠한 반전도, 감정의 끓어오름도 없이 영화는 물처럼 고요히 흘러간다. 실제 우리의 삶이 그러하듯.
인물에게 좀처럼 클로즈업으로 다가서려 하지 않는, 카메라를 최대한 당겨봐야 바스트 숏 정도에서 그치는 카메라의 태도는 신중함의 산물이다. ‘여름날’의 거리두기는 보는 이에게 두 가지 효과를 자아낸다. 먼저 얼굴을 부각시키지 않음으로써 인물을 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라, 정체를 특정할 수 없는 어떤 익명의 존재처럼 여기게 한다. 인물의 정면보다는 뒷모습이나 옆얼굴을 더 많이 잡고, 때때로 침윤하는 공간의 어둠 속에 묻어버리기도 주저하지 않는 것 또한 인물을 익명화하는 것이 작품의 의도임을 드러내 준다. 이러한 연출을 통해 관객은 승희를 영화 속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비슷한 삶의 경험을 공유하는 우리 시대, 우리 세대의 어느 누군가로 받아들이게 된다.
다른 효과는 인물 자체보다 그를 둘러싼 풍경과 공간에 집중하도록 유도한다는 점이다. 통념적으로 영화의 감정은 연기하는 배우의 표정을 통해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여름날’은 다르게 사유한다. 감독은 인물조차도 풍경을 구성하는 세상의 한 일부이며, 배우의 몸짓과 대화는 풍경과 맞물리는 상호작용을 통해서 드라마와 감정을 빚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영화상에서 승희가 겪는 외로움과 절망감, 슬픔의 감정은 침묵과 적막 속에서도 장면의 구성과 유장한 리듬을 통해 관객에게 유추되고 전달된다. 이미지와 대사의 낭비, 감정 표현의 과잉을 일절 찾아볼 수 없는 이러한 연출의 미니멀리즘은 구구절절하게 설명을 늘어놓으려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영화의 매 장면들을 곱씹게 한다.
승희의 발걸음을 따라가면서 마주치게 되는 풍경들은 관객에게 현실의 많은 단면들을 환기시키고 상념에 빠지게 한다.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몰려갔든, 고향인 지방에 남았든 미래의 전망은 없는 청년 세대의 막막함, 불안정한 주거 환경과 기반 산업을 잃고 점차 무너져가는 지방과 노동의 현실, 거제 둔덕기 섬을 거닐 때 인물 간의 대화에서 드러나듯 지방을 버려진 ‘유배지’로 받아들이는 한국 사회의 공간학적 인식 등이 어느 것 하나 특정해 지적해주는 대사나 내레이션 없이도 스쳐지나가는 풍경을 통해서 제시된다. ‘여름날’은 풍경의 영화다.
영화는 어떤 주제에 국한되지도, 정치적인 주장을 내세우지도 않지만, 단지 보여주는 것만으로 현실의 복잡다단한 면면들을 온전히 담아내는 작가적 역설을 실천해낸다. 이처럼 군더더기 없고 정직한 리얼리즘은 좀처럼 보기 드물다.
영화평론가